원래 그렇게 살았어야 하지 않나요

- 건강검진이 주는 냉정한 효과

by 정원에

토요일 저녁. 지인 가족과 조촐한 모임을 하는 동안에 9시가 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산해진미를 보면서 금식을 해야 했다. 일요일 9시 반. 친절하기로, 용하기로 동네 의원 - 사람을 엄격하게 평가하는 우리 부모님이 일단 좋아라 하시면 참 좋은 곳이다, 일단 - 은 건강검진을 하려는 사람들로 이미 그득했다.


한참을 기다리다 간호사 한분이 나를 안내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시력, 청력 검사를 하고 심전도 검사를 했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그분은 마치 학력고사를 보던 날, 눈발 날리는 언덕 아래 하루 종일 기다리고 계시던 나의 어머니 같았다. 피검사를 마친 뒤, 분변 통을 받아 화장실로 향했다. 그 사이 왼쪽 팔뚝에 혈액 검사 후 수면내시경을 위해 남겨 둔 주삿바늘 주입구가 덜렁거렸다.


아침 일찍, 화장실을 다녀오는 습관 때문에 꽤 애를 먹다가 어렵사리 분변 통을 간호사님 시킨 대로 완성(?)한 후 덩그러니 놓여 있는 회색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초록색 분변 통 커버가 한참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구, 더러운 일을 매일 같이, 일요일도 쉬지 않고 다들 해주시는구나' 싶었다.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아까 그 엄마 같은 간호사님이 내게 다가왔다.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어릴 적, 습했던 버스 대합실에 갑자기 나타나 웃어주던 친구처럼.


문진표를 작성해야 한다며, 나를 병원 내 카페처럼 꾸며 놓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걷어 부친 왼쪽 팔뚝을 오른팔로 고이 받치고 조르륵 따라갔다. 갑자기 우리집 앞 개천에 떠있는 새끼 오리가 떠올랐다. 꽤 많은 양의 문진표를 어떻게, 어디까지 작성하는지 설명을 해주고는 이내 검사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옆을 스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읽어 내려갔다. 나에게 쥐어 준 볼펜 한 자루를 소중하게 감싸 안고.


체크를 하는 동안에 다음 몇 가지 질문에 '멈칫'하게 되었다.

1) 평소 1주일간, 숨이 많이 차게 만드는 고강도 신체활동을 며칠 하십니까

2) 일을 하는 것에 대한 흥미나 재미가 거의 없음

3) 잠들기 어렵거나 자꾸 깨어남, 혹은 너무 많이 잠

4) 지난 1년간, 음주 후 술을 마신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이 있습니까

5) 육류, 생선, 달걀, 콩, 두부 등으로 된 음식을 매일 3회 이상 먹습니까

6) 과일을 매일 먹습니까

7) 콜레스테롤이 많은 식품(삼겹살, 달걀노른자, 오징어 등)을 얼마나 자주 먹습니까


건강검진 문진표의 질문이 건강한 일상생활 패턴을 스스로 체크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는 생각은 매번 하게 되지만, 그렇게만 살면은 건강하겠지만, 문제는 엄격해도 너무 엄격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비 내리는 일요일 아침에. 자기 고백에 직면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만드는 일순간을 경험하게 하지만, 병원문을 나오면, 문진표 밖의 세상에 직면해야 한다. 자기와의 싸움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잊을만하면 접하게 되는 건강검진은 갑자기 물어보는 질문 같다. 준비 못한 쪽지 시험 같다. 그런데 할 말이 없다. 당황스럽지만, 이미 다 그렇게 살았어야 하지 않나 하고 타박하는 것 같기 때문에. 에구, 오늘도 숨이 찰 기회도 없고, 자는데 자는 것 같지 않고, 매일이 아니라 순간순간 후회를 하고, 되는대로 먹고, 아니 챙겨 먹으면 다행이고, 그러다 보면 꼭 과일은 사치가 되고. 그저,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기하고 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나 스스로를 토닥이느라, 한없이 허용적이 된다. 내년 이맘때 다시 한번 자기 고백에 직면하겠지만, 지금은 언제나 건강하다는 생각으로 미련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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