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지나다니는 산책로에 주르륵 서 있는 나무들. 유난히 나를 붙잡아 세운다. 땅속 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며 펄떡이는 뿌리의 영혼이 느껴진다. 그 위에 서서, 쪼그려 앉아서 나무의 정령을 만난다. 나무앞에만 서면 표현할 수 없이 웅장해진다.
내게 속삭인다. 지구가 흔들려도 끄덕없을 기둥이, 온 세상을 향해 느릿하게 손짓하는 줄기가, 따끈한 봄 햇살에 신이 난듯 파닥거리는 이파리들이, 언제나 지지하고 응원하며 바람만큼 흔들리는 가지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두 걸음마다 하나씩 서 있는 나무들 대부분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막 잘려 나간 듯 속살 새하얀 가지에서 끈적한 눈물을 흘린다. 이미 오래전 잘린 나무는 벌써 새살고리가 도톰하게 올라와 잘린 가지를 안으로 감싸고 있다.
흙 위로 올라앉은 나무줄기는 봄비에 축축해진 채 이끼옷을 두껍게 덮고 있다. 그걸 보면서 옆 나무는 알사탕 여러 알 입에 문듯 새살고리마저 아물어 한참, 아주 한참 뒤에라도 다시 새 줄기를 뻗어 올릴 준비를 다 마친 것 같다.
하늘로 밀어 올린 세 개의 통통한 가지를 이고 있는 줄기는 제 방향이 강제로 꺽였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또 그 방향의 하늘을 가리킨다. 손을 가져다 서서히 쓸어내리다 보니 조각나고 틈을 낸 나무 껍질이 마치 세상의 모든 길, 모든 동네같다.
스물거리며 기어 오르는 점같은 개미 한마리가 골짜기에 빠졌다가 나왔다 하면서 분주하게 살아 움직인다. 나같다. 괜히 마음이 아리다. 나무도 나무로 살기 위해 이렇게 애쓰는구나 싶다.
나무야, 그들이 널 어떻게 잘라놓은 거니?
너 어찌 그리 낯설고 이상한 모양이냐!
백번이나 얼마나 아픔을 겪었기에 네 안에
반항과 의지 말고 다른 게 없단 말이야!
난 너와 같이, 잘리면서 아픔을 겪은
목숨을 망가뜨리지 않고
시달리며 견딘 야비함에서 벗어나 매일
다시 빛을 향해 이마를 들어 올려.
내게 있는 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세상은 죽도록 비웃었어.
하지만 내 본질은 부서지는 게 아니야.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백번이나 잘린 가지들에서
참을성 있게 새 잎사귀를 내놓는 거야.
그 온갖 아픔에도 나는 그대로 남아
이 미친 세상을 사랑하는 거야.
_헤르만 헤세, 헤르만헤세의 나무들, 2021, 창비
내 마음만을 가지고 한 번 더 천천히 쓸어내리는 데에 단단하게 몸통에 매달린 나무의 상처들이 내 손을 슬쩍 밀어낸다. 나무가 나를 감싸 안아 준다. 연한 가지 하나가 내 가슴에 청진기가 되어 닿는다. 나무의 정령이 나의 심장을 어루만지며 속삭인다.
나는 뿌리다
물어라! 낮과 밤을, 여름과 겨울을 이으며 네가 살고 있는 지구의 소리를 듣는단다. 언제나 그 소리를 너에게 뿌린다. 바람이 되어, 향이 되어, 노래가 되어서. 나는 우주에 박혀 있는 거란다. 넌 어디에 뿌리를 박고 사느냐.
나는 껍질이다
벗어나라!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벗겨내는 방패란다. 나를 보며 안쓰러워하지 마라. 나는 네가 더 안쓰럽다. 누더기가 다 된 두꺼운 갑옷을 사시사철 입고 있는 게 바로 너 아니냐. 그것으로 너는 대체 무엇을 막으려고만 하느냐.
나는 잎이다
마음껏 흔들려라! 나는 수천, 수만 개의 심장을 가졌다. 심장 몇 개쯤 떨어뜨려도 문제없다. 아니, 모든 심장이 떨어져 나가도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아난다. 단 하나뿐인 너의 가녀린 심장은 무엇에 펄떡이느냐.
나는 꽃이고, 열매다
아파해라! 나는 결실이 아니란다. 나무는 꽃이고 열매가 아니란다. 수백년, 수천년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고 아무는 성장통이다. 월요일에도 멈추지 않는 통증이다. 꽃만 보고 열매만 원하는 너의 영혼은 누구에게 꽃이고 어떤 열매인 것이냐.
나는 가지다
바쳐라! 나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고, 희망과 가능성을 연결하고, 생명수를 구석 구석 연결한다. 앞으로도 수십년, 수백년을 연결하리라. 이제 오십년 갓 넘게 산 너는 지금껏 무엇으로 바쁘냐. 너의 생명수는 무엇이냐.
한참을 나무들에 정신없이 혼나다 문득 떠올랐다. 8년 전 느닷없이 찾아온 병마로 48일간 병가를 내야 했을 때.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후 무언가에 이끌리 듯 찾아갔던 곳,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하루 종일 머물렀던 곳, 그곳이 바로 '숲'이었고 '나무들'이었다는 사실이.
바싹 마른 낙엽과 채 영글지 못한 햇잣송이, 잠깐만 멈추면 귀가 아플 정도의 다양한 풀벌레소리들의 질서 있는 합창, 본능처럼 심호흡으로 마음컷 들이키는 맑은 공기, 까슬까슬 부드럽고 신선한 바람, 세상 어느 향수보다 더 뇌를 자극하는 내음, 구름과 어우러진 하늘 그리고 사랑, 다짐, 용기, 그리움, 감사함. 이 모든 것이 이곳에서는 몽땅 천 원이다.
_2017년 9월 22일 <국립수목원에서>중 일부(48-18)
잊었던 감각이 깨어난다. 나무는 외로울 틈이 없다. 힘들어 늘어질 겨를이 없다. 매일, 매 순간, 월요일도, 휴일에도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지략가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내)야 한다.
100년도 온전히 살지 못할 내가 인간에게 잘려 나가지만 않으면 수백 년에서 천년을 넘게 사는 나무의 마음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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