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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때

[ 나무야 나무야 ] 01

by 정원에

어제 점심시간. 텃밭에 다녀온 동료가 귀한 명이나물이라며 한 움큼 나눠 주었다. 더덕 위에서 한 달 내내 키운 귀한 나물을 나눠주는 그의 얼굴은 신선한 채소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덕분에 아내와의 저녁 메뉴는 삼겹살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명이나물은 낯설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식당이나 고깃집에 드나들며 알게 되었던 거다.


반 농사꾼인 동료는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마늘'이 외국에서 들어온 개량종 알마늘일 수 없다면서 명이나물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명이나물은 어릴 적 '산마늘'이라고 불렀던 찬거리다. 어제 봉지를 받으면서 코를 집어넣어 폐 깊숙이 냄새를 맡아봤다. 오랜만에 구운 마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제 막 '제철'인 산마늘처럼 살다 보니 '제 때'라는 게 잊지 싶다. 아무리 비닐하우스 속에서 기온을 속여가며 만들어 낸다고 해도 땅은, 지력은 본성을 기억하는 법이니까.

숲 속을 걸으면서, 연애하듯 나무와 나무 사이를 휘감듯 지나면서 물었다. '삶의 제철'은 언제이니?. 삶에도 제 때가 있을까?


거기에 대해 일찍이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똑같이 철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이는 늙었을 때에 지나간 일들에 감사함으로써 여러 가지 좋은 일로 젊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고, 다른 한편 늙은이는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늙어서도 동시에 젊게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_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2016, 동서문화사 ,p.715



에피쿠로스가 말한 '철학을 한다는 것'을 거대하게, 무겁게 받아들일 제간이 여전히 역부족이다. 산나물이 명이나물로 유명해진과 같다는 생각을 하는 정도다. 내게 철학은 그 정도다.


숲 속을 거닐면서, 나무를 부둥켜안고 본질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어떻게든' 사는 게 아닐까라고 되뇌게 된다.


철학이 삶의 진실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동일하다. 어떻게 펼쳐내 던 나의 몫일뿐이다.


삶의 방식이나 철학적 이상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잘 살아내기 위한 태도부터 갖는 게 먼저이지 싶다. 스스로 내뱉는 생각, 말, 표현 방식부터.


건강한 혼을 위해 튼튼한 뿌리만큼 끊임없이 방향을 탐지하고 틀고 길어지고 멈추는 잔뿌리가 나무를 살린다.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생존 자체가 우선이다. 내 철학은 이 정도다.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때는 분명 있다.


평생 어느 때나, 아무 때나 해야만 하는 철학적 삶만 예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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