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들의 본질에 대하여
결혼을 하면서 의례 그렇듯 패키지로 구입했던 TV를 아이들이 태어나고는 한참,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아이들이 크면서 TV를 구입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이들을 위해였지만, 아내와 가만히 이야기 나눠 보니, 우리 몸이 기억하는 습관 때문이었더군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장 일반적인 휴식은, 정보 습득의 유일한 매체는, 사회 따라잡기 방식은 TV 시청이었던 거지요. 퇴근 후 지친 마음과 몸을 하릴없이 '현란한 상자'에 바치면서 그렇게 하는 게 제대로 쉬는 줄 알았습니다. 휴일에 잠 보충만큼, TV 보충을 해야, 그게 사는 건 줄 알았던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더 크면서, 각자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게 되면서, 그렇게 반복되는 듯한 평일 저녁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하면서, 대화를 나누지 않고, 읽지 못하고, 운동하지 않는 그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보이면서, 그 사이 몇 번의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보름 전 날 저녁, 미련 없이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런데 거실에서 TV가 없어지고 나니, 거실의 본래 용도가 살아나더군요. 먼저, 소리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 토요일 오전 7시 -, 창밖에는 비가 옵니다. 그 빗소리가 후드득, 후드득 반복하면서 고스란히 들립니다. 그 소리를 방해하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듣고 싶은 소리가 듣기 싫은 소리에 방해받지 않네요. 그리고 거실에 참 많이 넓어졌습니다. 커다란 TV를 설치하기 위해, 매달기 위해 마련되었던 가구도 함께 사라졌으니까요. 그 자리에는 자그마한 테이블을 하나 두었습니다. 가족들과 차담을 나누거나 식탁으로 쓰거나 좌식 책상으로 쓰는 용도로. 아주 좋습니다. 또 있습니다. TV 맞은편 책장에 꽂혀 있던, 많은 책들을 구석구석 쳐다보다 꺼내어 읽게 됩니다. 다 읽었다 싶었는데, 읽지 않은 책이 아직도 많더군요. 일상적으로 쳐다보는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변화는 TV 채널 쟁탈전이 사라졌습니다. 경쟁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거랑, 보기 싫은 게 어찌나 그렇게 자주 있던지. 아이들도, 우리들도, 그때마다 당연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대상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러다 보면 사라진듯한 폭력성이 발동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짜장 vs 짬뽕, 후라이드 vs 양념, 면 vs 밥 정도인 듯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훨씬 더 배타적이 됩니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거나, 이해하는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아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이해 못 하고, 딸이 좋아하는 사람이 더 싫어지고, 아내가 빠져드는 내용이 우리 가족의 모순처럼 도드라져 보며 마음 불편해지고. 참 나이 먹고 바보 같지요. 누가 그런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는데,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TV는 바보상자'. 같이 있는 듯 하지만, 철저히 따로 노는 겁니다. 채널 쟁탈전의 끝은 누군가가 그 자리를 떠나면서 끝나기 일쑤입니다. 누군가는 방 속으로 사라지거나, 잠을 청하거나. 그리고 각자의 영역에서 또 다시 '자그마한 TV'인 휴대폰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아이디와 익명속으로. 표면적으로는 평화롭더라도 심리적으로는 단절이지요. 끊어짐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같이의 순간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같이 마시고, 같이 먹고, 같이 이야기 나누고. 이어짐입니다. 따로 있는 듯 하지만, 같이 쉬는 겁니다.
이제 크레딧 카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검색을 해보니 2020년 기준, 한국인 1인당 평균 3.9장의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 역시 ㅅ, ㅎ, ㄹ, ㄴ 대기업의 카드 4장을 가지고 있네요. 이중 체크카드 1개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장은 크레딧 카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네 장의 신용카드에는 만들어야 한다는 그럴듯한 사연이 있었더군요. ㅅ은 급여가 들어오면 관리비가 3% 할인된다고 해서, ㅎ은 위에서 버린 TV를 포인트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고 해서 - 물론 TV 구입 다음 달부터 몇십만 원을 넘기기 위해 참 착실하게 소비해댔습니다 -, ㄹ은 안마 의자를 좋은 조건(?)에 할부로 구입할 수 있어서 - 지나고 보니 좋은 조건의 주체가 우리 부부는 아니더군요 -, ㄴ은 아주 한참만에 만난 오랜 친구처럼 달려든 영업 사원 덕분에.
하지만, 그럴듯한 그 사연이 사라진 다음에도, 편하다는 이유로, 지금 당장 돈의 압박을 덜 받는다는 이유로, 연말정산을 내세운 충동질에 어깨춤을 추느라, 거대 대부업체들이 선심 쓰듯 올려주는 한도에 취해, 그 한도로 사마신 술에 취해, 연간 몇만 원 할인 정책에 엉덩이를 흔드느라, 차를 끌고 이리저리 쏠려 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놀았더군요. 물론 분별없이 과도하게 월급을 넘치게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아이들 교육에, 부모님 병원비에, 소소한 소비에 잘 활용을 했지만, 핵심은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지금 당장의 필요한 소비를 위해였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다행인 건 결혼 후에는 지금껏 한 번도 크레딧 카드 대금을 연체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건강하게 생활을 해 온 것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봅니다. 하지만 결혼 전 미혼일 때는 얄팍한 벌이에 비해 비율적으로 소비가 컸던 원인 중 많은 부분은 바로 '크레딧' 카드 덕분입니다. 사회 초년생이 가끔은 몇만 원이 통장에 없어서 독촉 문자를 받고, 스스로 주눅 들어 있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군요.
아주 어릴 때부터 집 앞 구멍가게로 할아버지, 엄마의 심부름을 많이 다녔습니다. 할아버지 막걸리를 노란 주전자에 담아 들고 오면서도, 내 손에 쥐어진 쫀드기에 신이 났습니다. 엄마가 두부 한모 사 오라시면 역시 설탕이 허옇게 뿌려진 사탕을 먹을 수 있어 쏜살같이 뛰어 나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돈은 필요 없었습니다. 현금이 없어도 막걸리도, 두부도 살 수 있었고, 쫀드기도 한 개 더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구멍가게 아줌마한테는 누런 가죽으로 덮은 수북한 장부가 있었습니다. 그 끝부분에는 수많은 마을 사람들의 이름들이 깨알같이 써져 있는 간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가다나 순으로. 그래서 내가 물건을 고르는 동안, ' 00 왔냐' 하면서 엄마의 이름이 적힌, 간지를 슬쩍 넘기는 겁니다. 두 페이지 걸쳐, 어느 날 뭘 얼마나 가져갔는지 적는 겁니다. 그리고 아빠 월급 다음날 엄마가 어깨에 힘을 주면서 한 달에 한번, 결재라는 걸 한 겁니다. '외상'이었습니다. 매달 정기 결재하는 '할부'였습니다. ㅅ, ㅎ, ㄹ, ㄴ 대기업의 컴퓨터 서버 안에는 그 오래전 동네 구멍가게의 장부보다 훨씬 더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 동선이, 생활 패턴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기 결제일 일주일 전부터 아주 친절하게, 매우 자세하게 안내하기 시작합니다. '외상값 갚을 준비되었냐고'. 돌아다니면서 먹고 쓸 때는 몰랐던, 현실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순간에, 크레딧 카드 앞에서 대범해집니다. 아내보다는 내가 더. 아이들 앞에서 '먹을 땐 먹어'라고 얘기 좀 해줘야, 아끼지 말고 팍팍 긁어줘야, 쓸 때는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증이 있습니다. 밥벌이하느라 생긴 고단함에 대한 무의식적 보상심리입니다. 그런데 이 심리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경제'에 대한 공부를, 관심을 가지지 않은 상태로, 그런 기회가 별로 없는 상태로 경제 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 갚아야지'하면서 그제야 받을 월급에서 얼마가 사라져야 하는구나, 하고 날짜수까지 계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씀씀이에 대한 가늠이 나 스스로 잘 되질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을 하는, 밥벌이 생활이지만, 뭐 그렇게 크게 잘못한 게 없지만, 그냥 먹고사는데 조금 쓰는 거지만, 언제나 '뭘 그렇게 먹었니? 샀니? 입었니? 돌아다녔니?'하고 스스로 묻게 되는 일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겁니다. 모 광고처럼, 그러다 한 달이라도 알아 누우면, 아니 잠깐이라도 쉬게 되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게 되는 겁니다. '크렛딧'은 신용입니다. 신용은 외상입니다. 외상은 미래의 수익을 미리 당겨 쓰는 겁니다. 요즘에는 더더욱 당겨 쓰는 방식을 정말 편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손가락 하나만 쓰윽하면 됩니다. 정말 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무감각해집니다. 한 달을 주기로 반복해서. 이 둘은 오늘같은 주말에는 더욱 더 이 둘의 본질이 발휘하는 진가(?)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일상 생활의 상당 부분이 이 둘의 본질적 작용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