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현재에 대하여
햇살 넘치는 일요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걸었습니다. 물을 한잔 컵에 담아 천천히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 걸음 걸어 거실 큰 창문을 열었습니다. 기분 좋게 매콤한 고추 한 잎 배어문 듯, 화분들 사이로 사사삭 찬 공기가 훅 들어옵니다. 이내 넓디 넓어진 거실을 한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내 온몸을 감싸 앉아줍니다.
거실이 넓어진 가장 큰 이유는 거실 절반을 차지했던 TV를 그리고 TV 설치를 위한 가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거실을 한 바퀴 빙 둘러 돌아보다 보니, 주방 쪽 식탁 위에 파란색 크레딧 카드가 하나 올려져 있습니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 남겨 둔 ㅅ 체크카드입니다. 파란색 네모를 가만히 보다 보니, TV와 크레딧 카드, 이 둘의 공통점이 분명합니다. 이 둘에 깊게 빠져 있으면,
그 순간은 정신적인 힐링이 되는 듯합니다. 세상은 저렇게 맛있고, 재미있고, 밝고, 감동적이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이 정도는 소비하고 살아야지, 사는 맛이 난다고, 사람 사는 것 같다고, 사라고, 사라고, 버튼 한 번만 누르라고, 스윽하고 옆으로 한 번만 밀어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상황에 눈물짓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과 비슷한 것을, 중간에 많은 사람들의 손을 빌어 우리 집으로 다시 옮겨다 놓은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를 멈추고 나면, 헛헛한 느낌이 듭니다. 정말 똑같은 나를 다시 한번 직면하게 됩니다.
그 순간은 육체적인 피로가 해소되는 듯합니다. 하루 종일 써먹은 내 몸뚱이에 대한 보상을 위해 더욱더 분주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 정도 밥벌이하는 건 다 하는 건데, 뭘 그렇게 피곤하다고, 그 정도 체력 가지고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스스로에게 타박합니다. 그러면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합니다. 자기 몸을 위한, 신체적 능력 향상을 위한 간단한 조치도 없습니다. 그럴 시간이 TV를 보거나 쇼핑하는 데 양보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행위를 멈추고 나면, 뻐근한 느낌이 듭니다. 어김없이 더 피곤해진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은 육체적인 운동 없이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신 울어줄 때 따라 울고, 대신 웃어줄 때 같이 웃으면서. 그래서 심장 건강에는 좋은 듯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본질적으로 나의 삶과 그렇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순간에 감동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모든 이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나도 가있게 됩니다.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특별한 매력으로 보이게 됩니다. 비슷한 경험, 새것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스스로 창출합니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같이 않으면 뒤쳐진 거라는 불안함 때문에.
그 순간, 순간이 미래 수익에 대한 외상입니다. 할부입니다. 수익이 결코 돈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에너지 - 돈, 시간, 생각하는 방식, 협력하는 태도 등 - 를 대부분 '미래'를 당겨오는 데 소비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 지금 필요한 것과 당장은 필요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스스로 모호해집니다. 지금의 나, 지금의 내 시간, 지금의 내 생각, 지금의 나의 삶이 미래를 미리 소비하는 데 온 집중을 하게 됩니다. 미래의 시간을 당길 수 있을 만큼 당겨 놓고 보는, 외상 심리가 누적됩니다. 그래서 지금이 없어집니다. 마치 몇백만 원짜리 선수용 사이클을 샀지만, 거기에 맞는 몸은 만들지 않고 페달을 돌리는 경우처럼.
또 이 둘 덕분에 우리들의 생각들이 비슷해집니다. 비슷한 출처를 통한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정보를 알고 있고, 이야기 주젯 거리로 공유하는 정도가 됩니다. 자기 생각보다는 '그렇다더라'는 정도의 대화 주제에 멈추게 됩니다. 자기만의 판단 근거가 희박합니다. 사색의 시간이 줄어듭니다. 자기 생각의 근거를 스스로 제시하지 못합니다. 글은 고사하고 말로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자기 생각은 엄청난 휘발성을 가지고 있어,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다시 기억을 떠올리기 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사색을 통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둘에 빠져 있는 그 순간만큼은, 멜 레빈의 말처럼 '시각과 운동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겁니다. 생각을 거부하고, 움직임을 싫어합니다. 혹시 다행히 땀을 흘리는 걸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 깊은 사색을 하지 않게 됩니다. 아니, 제도적으로 사색을 방해받게 됩니다. 뭐, 일상생활을 하면서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게 가능하냐? 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깊은 사색은 별게 아니라, 내가 지금 뭘 원하는지, 왜 피곤한지,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은지, 이렇게 다운되어 있는지 등 이런 육체적, 심리적 변화에 대해 나 스스로가 나한테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시간,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몇 해 전부터 이벤트처럼 이야기가 흘러나왔던, '멍'때리기 정도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방송국 사람들도, 기재부 사람들도, 카드회사 사람들도 싫어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삶의 질은 국가의 삶의 질을 의미합니다. 국가의 품격으로 이어집니다. 개, 돼지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순수함을 지킨 인간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배경과 관계없이 차별적인 자기 삶의 방식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으면,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 자유로운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 '황홀경'에서 조금씩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사색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다른 듯 비슷한 삶이지만 비슷한 듯 다른 삶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그런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중요한 작용입니다. 말로만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개개인이 자기 삶을 돌아보는 사색이 있어야 합니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 둘에 빠져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줄이고, 그 시간을 자기를 살피는 시간으로, 그 결과를 표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10대부터 대통령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생색보다는 사색을 위한 시간이 많아져야 합니다. 걸으면서(간혹 달리면서), 읽으면서(때로는 토론하면서), 대화를 나누면서(자주 박장대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