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하루가 다 빠져나간 듯 축 처지는 날이 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지친,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런 날.
반면, 또 이런 날도 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지만, 억울하지도 않고 발걸음이 사뿐한 날. 같은 내가, 같은 체력으로, 같은 하루를 살았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
무엇이 그 다름을 만들어내는 걸까.
새벽 4시에 출발해서 400km 넘게 달려갔다 달려온 벌초. 열한시간만인 오후 3시 가까이 되어서 집에 도착을 했다.
수도권은 내내 더웠다는데 아버지와 올라간 산속 할아버지 묘에서는 시원한 폭우를 만나 온몸이 다 젖어버렸다. 5년 만에 꺼내 들고 간 예초기는 그 비에 젖어 엔진이 꺼진 후 다시 작동되지도 않았다.
언제 와도 낯선 어둑한 산속에서 아버지와 나는 엎드리다시 하며 낫과 손으로 잡초를, 풀을, 나무를 가르고 뽑아내었다. 얼굴 위를 거의 덮다시피 한 우의의 투명한 비닐 모자 속 아버지의 표정은 하늘보다 더 어둑했다.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된 그 표정은 마치 전장에서 처절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죽은 자들을 잘 보내려 눈물짓는 것처럼 보였다.
집에 돌아오니 폭우가 폭염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우비를 뚫고 들어 온 땅벌에 물린 허벅지가 따끔거렸다. 아내가 미쳐 버리지 못한 음식물을 들고 중문을 열고 다시 나갔다. 눅눅하게 후텁한 공기가 콧구멍에 비닐랩이 날아와 달라붙듯 숨이 막혔다.
다행히 출입문을 열자마자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두 세 걸음 걷는 사이 13이란 붉은색 숫자 위로 더 붉은 화살표가 깜빡이더니 이내 서서히 위로 움직였다. 한 걸음만 아니 새끼손가락 끝마디만 뻗어 누르기만 했었어도 엘리베이터를 단박에 탈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유난히 더 느리게 움직이는 듯하게 25층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땀을 잘 흘리지 않는 체질인데, 추운 것보다 더운 것을 열 배쯤은 더 좋아라 하는 체질인데도 층층마다 들리는 엘리베이터를 텁텁한 좁은 공간에서 기다리는 건 결코 유쾌하지는 않다. 1층으로 내려가 한참만에 올라 와 한 번에 꼭대기층까지 올라가는 걸 보면서 마음이 여유로워지지만은 않는다.
최대한 사회적 미소(열아홉 따님의 표현이다)를 지으면서 13층에서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데, 땀내가 엘리베이터에 가득했다. 몇 시간 전에 분명히 나에게서 났던 그 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나 싶었나 했는데, 아니었다. 검은색 코수염에 검은색 민소매, 검은색 바지에 맨발로 검은색 슬리퍼를 신은 택배기사였다.
아무런 소리 없이 같이 13층에서 11층, 7층, 4층 그리고 2층까지 네 개층을 더 멈추고서야 1층에서 같이 내릴 수 있었다. 열림버튼을 누른 사이 수많은 택배 상자를 싣고 왔을 초록색 손수레를 끌고 앞서 나가는 택배 기사의 등에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 젖은 도마뱀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란히 있는 음식물 수거함 제일 끝 바닥에 누군가가 음식물쓰레기가 다 들여다 보이는 투명 비닐봉지를 바닥에 놓아두고 사라졌다. 어깨를 내리쬐는 뜨거움 속에서 잠깐 생각을 했다. '깜빡했나? 내가 대신 들어 버릴까?' 그러는 사이 따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아빠. 참, 오늘 오늘 코코 병원!'
아, 강아지 진료를 예약한 걸 깜빡했다. 얼른 좀 전에 세워 둔 차를 지하에서 꺼내 따님 대신 코코를 안고 내려온 아드님과 함께 병원으로 출발했다. 6주 동안 나처럼 디스크를 다쳐 치료 중이었다. 뛰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중이었다.
출발하는 룸미러 뒤로 바닥에 나뒹구는 음식물 봉지가 한가득 들어왔다. 두 달 전 출산을 한 원장이 코코를 진료하고 그랬다. ‘가족들 사랑이 커서 그런가요, 아주 좋은 속도로 나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은 한 달 뒤에 뵈면 될 것 같고요, 오늘부터 다시 조심스럽게 산책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이 소식을 들은 아내도 따님도 벌초에 밀려 심심했던 하루의 지루함이 달아나는 듯하게 들렸다. 그러면서 전화기 너머로 그런다. '아빠, 피곤하셔서 쉬셔야 하니까. 오늘은 각자 집에서 쉬자'라고. 우리 집에서는 운전을 나만 한다. 나의 컨디션에 따라 움직이는 반경이 정해지는 이유다. 허릿병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병원에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른 강아지를 무서워하느라 잔뜩 긴장했다 그제야 다시 신이 난 코코를 보면서 아내를, 따님을, 아드님 얼굴도 돌아봤다. 더위에, 눅눅함에, 무료함으로 휘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는 거실 벽면에 기대어서, 따님과 아드님은 인사만 잠깐 건넨 뒤 자기 방으로 쏙 빨려 들려가 있었다. 심심해, 아까워, 놀아줘 하는 조용한 아우성이 들렸다.
'얘들아? 자기야! 우리 나갈까?' 시원한 쇼핑몰 가서 좀 걷고 맛난 거도 좀 먹을까? 오늘 아빠가 쏠게!'. 그러자마자 스물 하나 아드님은 좋다, 싫다는 말도 없이 출입문 옆 화장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따님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볼에 파우더를 바르기 시작했다. 이미 샤워를 마친 아내는 '오늘은 뭐 입을까?' 하며 안방 드레스장을 열었다.
다시 퍼붓기 시작하는 빗길에 천천히 달려가 밥도 (같이) 먹고, 옷도 (같이) 봐주고, 아이스크림도 (같이) 나눠 먹고, 한참을 (같이) 걷다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각자 돈으로 산 자기 옷들을 입어 보며 거실 패션쇼를 하기도 했다. 그제야 몽롱하게 하루의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는데, 묘하게도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
그날 밤, 내 안의 내가 조용히 속삭이는 걸 들었다.
‘너는 이 집의 하루야. 네가 움직이면 이 집이 움직여. 너의 기분과 체력이 저 사람들의 하루를 이어주고 살게 해. 그러니 기억해. 아침 운동을, 기록을, 마음을. 체력을 먼저 준비해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너 자신을 잘 간직하는 것, 그게 가족을 가장 오래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꿈결에서도 평생 그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했던, 내 아버지의 축축하게 젖은 표정이 다시 떠 올랐다.
[ 알림 ] _ 8월 23일 [ 위대한 시간 2 ]에 작가와 독자를 초대합니다!!
@일정 : 2025. 8. 23(토) 13:00-17:00 (1차 -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
2025. 8. 30(토) 17:00-19:00 (2차 - 온라인)
@참여방법 : 참가비(1,2차 모두 합쳐 3만 원). 아래 신청링크 클릭
@장소 및 신청기한은 따로 명시하지 않겠습니다.(지난 1월이 경우 너무 많이 모이셔서 부득이하게 온라인으로 참여를 유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청기한은 선착순으로 100분까지만 오프라인, 그 이후는 온라인으로 참여하실 수 있으며 장소도 인원에 따라 변경될 수 있기에 '서울'이라는 것만 알려드리고 차후 공지하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ji_dam_
@브런치북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로 7월 28일부터 30일 연속 글쓰기 중입니다. 30일 뒤에 한 권의 초고를 완성하려는 도전입니다. 그러는 동안 기존 라이팅 레시피는 잠시 멈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