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 오늘 왜 이렇게 이쁘냐?”
딸아이가 옆에서 셀카를 보여주며 눈을 찡긋한다. 휴대폰 속에는 거의 비슷해 보이는 사진들이 영화 필름처럼 줄줄이 이어진다.
“가장 잘 나온 거 하나만 골라줘.”
나는 고심 끝에 다른 듯 같은 한 장을 골랐다, 그랬더니 이내 딸아이는 장난스럽게 말한다.
“아빠한테 보내줄까?”
내 톡창으로 내가 고른 사진이 하나 날아온다. 환한 미소, 자연스러운 포즈, 얼굴 가득한 자신감.
어쩌면 그 순간, 나는 단지 ‘사진’을 본 것이 아니라, 어느 봄날 아침, 아주 오래전 그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간 기억 하나를 마주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출근길. 라디오에서 들려온 멘트 하나가 귀를 사로잡았다.
“영국의 아빠 수업에는 머리 묶어주기 수업이 있습니다.”
단순한 한 문장이었지만 이상하게 가슴 한가운데가 '쿵'하고 울렸다. 15년쯤 전이었을까.
나는 직장 생활 10여년만에 처음으로 타 기관에 파견을 나가, 일 년 동안 비교적 자유로운 스케줄로 연구 활동을 하던 해였다.
정기적인 연구 공유는 있었지만, 시간의 주도권이 비교적 내게 있었고, 그 덕에 그 해 몇 달 동안, 네 살이던 딸아이를 직접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건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한 시기였다. 직함은 ‘연구자’였지만, 그 시기동안 더 중요한 역할은 매일 아침 ‘헤어 디자이너’였다. 이름하여, 딸아이 머리 묶기 담당.
아내가 출근 전에 미리 묶어줄 때도 있었지만, 그건 일주일 중 하루, 이틀 정도였다. 자는 아이 머리를 묶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머지 날은 내 손에 맡겨진 길고 깊은 머리숱과의 한판 승부였다. 그 승부는 생각보다 진지했다.
물기를 너무 많이 묻히면 머리카락이 떡졌고, 적게 묻히면 잔머리가 흘러내리기를 반복했다. 정수리 가운데 단정하게 묶여야 하는 위치를 찾기 위해 여러 번 손으로 쓸어보았다,
한 손으로 머리끈을 짱짱하게 감아 돌리는 건 더 쉽지 않았다. 그 경험 덕분에 지금도 누군가가 척척 자기 머리카락을 척척 밴드 하나로 묶는 모습을 보게 되면 멍하니 바라보는 가 보다.
“아빠는 왜 엄마하고 할머니처럼 못 묶어?”
딸아이는 칭얼댔다. 그럴 때마다 내심 억울했다. 이게 얼마나 고도의 기술인지, 내 손가락이 얼마나 굵고 어색한지를 네가 아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엔 묵묵히 머리끈을 다시 풀고, 또 묶었다.
머리를 묶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래도 거울 앞에 앉아 졸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딸은 다 묶고 나면 조그만 손으로 ‘엄지 척’을 해주곤 했다.
노란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다른 엄마들 틈에 서 있던 아빠 하나. 그 아빠는 머리를 잘 묶지 못해도 늘 딸아이의 귀 뒤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시절, 나는 무언가를 터득하게 되었다. 머리 묶기의 3원칙. 나는 그것을 ‘아빠예’라 불렀다.
“아프지 않게, 빠르게, 예쁘게.”
<아프지 않게> 고무줄을 감을 때 머리카락이 끼이지 않게 조심하고, 빗을 당길 때 손에 힘을 빼는 것. <빠르게> 시간이 없으니까. 출근도, 등원도 놓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조급하지 않게 빠르게. <예쁘게> 아이의 얼굴형, 머리숱, 오늘의 옷차림까지 고려해서 단아하고 깔끔하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머리 묶는 기술이라기보다, 아이와의 시간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날 라디오에서 그 ‘아빠예’가 그대로 흘러나오는 걸 듣고 나는 놀랐다. 물론 나에게만 그렇게 들렸을 테지만.
그러면서, 진행자는 말했다.
“아빠들은 엄마보다 손가락이 굵고, 손 근육이 많이 굳어 있어요.”
맞는 말이었다. 생각했다. 세상 모든 직업 중 손을 쓰지 않는 일이 있을까? 연주가, 무용가, 프로그래머, 외과의사, 제빵사, 무대 감독, 작가, 청소 노동자, 아파트 경비 반장, 치킨집 사장, 택배 기사, 아이를 키우는 아빠까지.
우리는 모두 손으로 사랑을 전하고, 일상을 묶으며 살아간다. 사람은 가장 힘들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손을 먼저 움직인다.
손가락을 털고, 깍지를 끼고, 만지작거리고, 약속을 하고, 소식을 전한다. 손이 기억하는 감각, 손이 담고 있는 온기, 손끝에서 나오는 돌봄.
지금 딸아이는 멀리 바다 건너 있다. 오빠가 공부하러 떠났던 그 길을 따라,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출국하던 날, 울보 딸은 많이 울지 않았다. 나도 조금 울었다. 나를 안아주고 돌아 선 딸의 뒷모습을 보일 때 나는 알았다. 우린 이미 오래전부터 예쁘게 묶여 있었다는 걸.
머리카락을 묶는 동안, 우린 마음을 묶었다. 그건 하루하루의 반복 속에서 스며든 연결이었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아는, 둘만의 방식이었다.
지금 딸은 혼자서 머리를 묶고, 혼자서 음식을 해 먹고, 혼자서 낯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러면서 여전히 가끔, 사진을 보내준다.
머리를 질끈 묶은 날, 뭔가 답답한 날, 어쩐지 '아빠, 나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한 사진. 나는 여전히 그중 가장 예쁜 걸 혼자서 골라본다.
나는 여전히 손가락 스트레칭을 한다. 딸이 다시 돌아오는 날, 혹은 내 손길이 또 필요한 날을 위해.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또 묶어줄 거다.
그때는
아프지 않게, 빠르지 않게, 예쁘게.
우리의 시간을, 마음을, 서로를.
[ 알림 ] _ 8월 23일 [ 위대한 시간 2 ]에 작가와 독자를 초대합니다!!
@일정 : 2025. 8. 23(토) 13:00-17:00 (1차 -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
2025. 8. 30(토) 17:00-19:00 (2차 - 온라인)
@참여방법 : 참가비(1,2차 모두 합쳐 3만 원). 아래 신청링크 클릭
@장소 및 신청기한은 따로 명시하지 않겠습니다.(지난 1월이 경우 너무 많이 모이셔서 부득이하게 온라인으로 참여를 유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청기한은 선착순으로 100분까지만 오프라인, 그 이후는 온라인으로 참여하실 수 있으며 장소도 인원에 따라 변경될 수 있기에 '서울'이라는 것만 알려드리고 차후 공지하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ji_dam_
@브런치북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로 7월 28일부터 30일 연속 글쓰기 중입니다. 30일 뒤에 한 권의 초고를 완성하려는 도전입니다. 그러는 동안 기존 라이팅 레시피는 잠시 멈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