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서 발견한 부자되는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 20

by 정원에


'나를 움직이는 힘은 말이야, 돈이야. 돈. 난 돈 주는 사람한테는 잘해. 그래야 먹고살지.'


'그래? 맞는 말이네. 그건 그렇고. 넌 어디에 있을 때 마음이 제일 편안해?'

'난, 우리 집. 그럼, 넌 어디에 있을 때 마음이 젤 안 편한데?'

'나? 나도..... 우리 집.'


'어? 그러쿤!.'


2층에서 3층으로 돌아 올라가는 계단 끝. 별관으로 이어지는 철제문을 막 열려는 순간이었다. 급식 지도를 하는 중, 점심 줄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수업에서 앞뒤로 나란히 앉아 있던 아이들이다.


평소엔 장난스러운 표정이 가득한 사이였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날만큼은 유난히 진지해다. 나는 직감했다. 이-푸 투안(Yi-Fu Tuan)이 내 수업을 빌려 던진 질문이, 아이들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음을.


'자신의 토포필리아 topophilia를 생각해 보고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


토포필리아.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머물기만 해도 좋은 추억이 되살아나는 곳, 지친 몸과 마음이 충전되는 곳. 바로 '최애'하는 장소에 대한 애착, 즉 장소애다.


그리스어 '토포스(topos, 장소)'와 '필리아(phiia, 애착, 사랑)'가 합쳐진 말. 즉, 사람과 장소 사이의 정서적 연대다.



매일 걷는 산책로(흔들의자)

00동 00 아파트 13층 발코니

자주 가는 카페(창가 맨 끝자리)

너무 좋아하는 00 공원(뒷동산)

운동장 맞은편 밤나무 아래 벤치

10년 넘게 살고 있는 우리 집(내 방)

초-중-고를 다 나온 바닷가 내 고향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집(문 바로 뒷자리)

출근 전 아침마다 매달려 보는 제일 키 큰 오른쪽 끝 철봉대

쉬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꼭 들르는 짧은 등산로(중간쯤에 있는 너른 바위)


토포필리아는 멀리 있지 않다. 크고 넓고 화려하지도 않다. 늘 우리가 스쳐 가는 일상 속에 있다. 인생을 돌이켜보면 결국 그것은 장소를 옮겨 다니는 시간의 총합이다. 한 곳에 머물다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 순간의 누적이 일상이고, 오늘이 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역설을 안긴다. 화려한 도시 풍경, 편리한 이동, 획일화된 공간 속에서 정작 자기만의 장소를 잃게 만든다. 사람과 소음을 피해, 빛을 피해 집 안으로 숨어들고, 심지어는 현실 대신 가상공간에 머물게 유혹한다.


집에 있어도 집이 그립고, 출근(등교)하자마자 다시 집에 가고 싶어지는 기묘한 감정이 생기는 이유다. 들어서기만 해도 숨이 고르고, 위로가 되고, 안정감을 주는 장소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진다. 18살이 14살을 돌아볼 때나, 54살이 14살을 돌아볼 때나, 결국 떠오르는 건 몇 개의 장면과 몇 개의 장소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통장은 흔적만 남아도, 그 장소와의 기억은 더욱 생생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조금 안다. 토포필리아가 곧 인생의 진짜 자산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의 토포필리아는 대부분 가장 오래 머문 곳, ‘우리 동네’라고 부르게 되는 곳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평생 돈을 벌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정작 삶이 끝나고 나서 마음속에 남는 것은 통장 숫자가 아니다. 그때의 장소, 그곳에서의 경험, 그곳에서의 교감이야말로 장부에 기록되는 진짜 재산이다.


들어서기만 해도 가슴이 펴지고, 숨이 깊어지고, 다시 시작할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그런 루트와 루틴을 가진 사람은 이미 부자(였)다. 작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넉넉한 여유가 묻어 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눈빛으로 듣고, 말투와 손길에 다정함이 스며 있다. 솔직하고 유머러스하며, 동시에 묵묵한 꾸준함을 지닌다. 세상은 오래전부터 바람에 실어, 공기 속에 흘려보내며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진짜 부자는 장소와 교감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삶은 결국 장소의 총합이다. 하루 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다정했는가, 오늘 하루에 얼마나 깊게 장소와 대화했는가. 그렇다면 이미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집이 불편하다고 했던 그 아이도, 언젠가 자기만의 장소를 발견해 “나는 진짜 부자였구나” 하고 깨닫는 삶을 살아가기를 응원한다.



[ 알림 ] _ 8월 23일 [ 위대한 시간 2 ]에 작가와 독자를 초대합니다!!

@일정 : 2025. 8. 23(토) 13:00-17:00 (1차 -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

2025. 8. 30(토) 17:00-19:00 (2차 - 온라인)

https://guhnyulwon.wixsite.com/my-site-2


@참여방법 : 참가비(1,2차 모두 합쳐 3만 원). 아래 신청링크 클릭

@신청링크 : https://forms.gle/3xgDsqr5VYCuQfpRA

https://blog.naver.com/ji_dam_

@브런치북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로 7월 28일부터 30일 연속 글쓰기 중입니다. 30일 뒤에 한 권의 초고를 완성하려는 도전입니다. 그러는 동안 기존 라이팅 레시피는 잠시 멈춥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무 같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