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귀; 노을

[ 언어와 나의 세계 ] 107

by 정원에


‘나’의 하루는 거대한 스케치북이다.

‘나’는 매일 그 위에 나만의 그림을 그린다.

다행히 이 작업이 외롭지 않은 건, ‘나’를 비추는 두 개의 특별한 조명 덕분이다.


첫 번째 조명은 아침의 ‘햇귀’.

문틈으로 스미는 이 볕은 갓 구운 빵 냄새가 진동하는 베이커리의 오븐 불빛을 닮았다.


햇귀는 밤새 식어버린 ‘나’의 열정을 노릇노릇하게 다시 부풀린다.


“어제 망쳤어도 괜찮아. 오늘은 새 판이야.”


햇귀는 100% 충전된 배터리처럼,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오프닝 시그널을 연신 보낸다.



두 번째 조명은 저녁의 ‘노을’이다.

하루 종일 치열하게 달린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코코아 한 잔처럼 달콤하다.

노을은 먼지 낀 창가마저 아름답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나’의 실수, 상처, 찌질했던 순간까지도 붉게 감싸 안으며 말한다.


“괜찮아. 그 상처마저도 네가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낸 증거야.”

노을은 그렇게 ‘나’의 하루를 긍정해 주는,

따스한 엔딩 크레딧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부신 햇귀와 뭉클한 노을도 매일 반복되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스케치북은 덧칠한 낙서들로 지저분해져 더 이상 그림을 그릴 틈이 없고, ‘나’는 빛의 소중함을 잊은 채 중력에 이끌린다.



바로 그때, 하늘은 ‘눈’을 내려보낸다.


눈은 햇귀의 뜨거운 열정도,

노을의 붉은 감상도

차가운 흰색으로 순식간에 덮어버린다.


세상은 잠시 멈추고,

조명은 흰 눈에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완벽한 덮음’이 있기에

‘나’는 깨닫는다.


햇귀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노을이 얼마나 따스했는지를.


눈은 혼란스러운 스케치북을 지우고,

‘나’에게 다시 ‘빈 페이지’를 선물하는 것만 같다.


“햇귀의 설렘과 노을의 위로를, 처음인 것처럼 다시 한번 그려보라고.”

그토록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단순히 눈이 좋아서가 아니라 엉망이 된 마음을 하얗게 덮고 다시 시작할 기회,

신이 내려준 그 ‘새하얀 휴식’이 간절하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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