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걸레'를 물려주기로 했다

[ 아빠의 유산 ] 57

by 정원에

아이야.


혹시나 이 편지 봉투를 뜯으며 “아빠가 드디어 숨겨둔 땅문서라도 주시는 건가?” 하고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너희에게 서울의 아파트나 번화가 상가를 물려줄 능력은 없다. 물론, 잘 알겠지만 능력이 있대도 주지는 않겠지만.


대신 나는 오늘 너희에게 그보다 훨씬 유지비가 적게 들고, 세금도 없으며, 평생 써도 닳지 않는 정신의 유산을 하나 넘겨주려 한다.


실망해서 편지를 덮으려는 그 손, 잠시만 멈춰라. 이건 두고 두고 네겐 꽤 괜찮은 거래일테니까!

젊은 시절, 나는 삶의 진리나 철학이 고상한 서재 책상 위나, 먼지 쌓인 두꺼운 책 속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폼 잡고 어려운 책들을 읽으며 ‘영혼의 구원’이니 ‘자아의 실현’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들을 찾아 헤맸지. 그런데 나이가 들어 깨닫고 보니, 철학은 엉덩이로 하는 게 아니라 발바닥으로 하는 거더구나.


그동안 읽은 수많은 책들은 결국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위대한 사상은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영상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너희도 살다 보면 마음이 시궁창처럼 꽉 막히거나, 온 우주가 나를 왕따 시키는 것 같은 날이 올 거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오늘은 잊어’ 하며 막연한 구원을 기다린다.


하지만 아빠가 장담하건대, 가만히 누워 있는 너를 구하러 오는 건 ‘구원’이 아니라 뱃살과 우울감뿐이란다. 내가 찾은 삶의 비법은 아주 사소하고 좀 우스꽝스러운 곳에 있더라.


나는 마음이 복잡해지면 책을 덮고 ‘걸레’를 든다. 방 구석구석의 먼지를 털어내고,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을 닦는다.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접시를 문지르다 보면, 신기하게도 내 마음의 찌꺼기도 같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또,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어서 화가 치밀 때는 운동화를 신고 냅다 산책을 나간다. 산책은 시시각각 뷰다 달라져서 참 좋단다. 그렇게 내 시점이 끊임없이 달라진다는 거여서 더 좋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거실 한복판에서 아주 편한 자세로 스트레칭을 한다. 햄스트링이 당겨오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존재의 가벼움’ 따위는 잊게 된다.


당장 내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데 니체의 고뇌가 무슨 소용이겠니? 니체도 아마 스쿼트를 하루에 50개씩 했다면, 그렇게 머리 아픈 소리는 좀 덜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의 실체다. ‘삶의 철학은 책상 위가 아니라 식탁과 산책로에서 완성된다’는 사실 말이다.

흔한 표현으로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거창한 깨달음을 기다리지 마라. 오늘 당장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이불을 개고, 동네 한 바퀴를 걷는 그 사소한 행위들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산책처럼 몸을 움직이면 생각의 물길이 바뀐다. 보이는 게 달라지고, 달라지면 생각이 고이지 않고 흐른다. 흐르면 에너지가 된다.

아빠는 너희가 ‘생각만 많은 사람’이 아니라 ‘일단 움직여서 생각을 태워버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건 건물주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지만, 훨씬 더 멋진 일이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거니까.


이게 바로 내가 너희에게 주는 ‘정신의 건물’이다. 청소만 잘하면 평생 임대료도 받을 수 있다. 물론 세입자는 너 자신이다.


그러니 부디, 우울이 문를 두드리면 문 열어주지 말고, 빗자루를 들고 나가 거실이라도 쓸어라. 너희의 땀방울이 그 어떤 명언보다 너희를 더 단단하게 지켜줄 테니까!

p.s

이 편지를 다 읽는 즉시 스쿼트 20개를 실시하거나, 지금 당장 화장실 청소를 해봐.아빠, 감동 다 깨지게 왜 이래요?”라고 묻지 말고. 허벅지가 뻐근해지거나 변기가 반짝거리는 순간, 너희는 이미 ‘철학’을 실천한 것이다. (인증샷 보내면 우버이츠 쏜다. 선착순 2명이다, 서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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