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거리면서 더 선명해지는 것들

[ 내마음 사전 ] 130

by 정원에





여든을 넘기신 부모님과 오십 중반인 우리 부부, 넷이 모인 밥상머리 대화는 요즘 들어 묘한 돌림노래 같아요.


“잠깐만, 내가 지금 뭐 하려고 했더라? 뭐지? 뭐지?”


현관문 비밀 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결국 날카로운 알람 소리를 한참 들었던 경험들도 모두 다 한번씩은 가지고 있더라구요.

서로의 깜빡거리는 기억력을 위로하다가, 결국엔 “우리 다 큰일이다”라며 웃음 반 걱정 반으로 마무리되곤 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억’을 서재에 꽂힌 책처럼 생각합니다. 언제든 필요할 때 꺼내 볼 수 있어야 하고, 한 권이라도 사라지면 서재가 망가진 것처럼 불안해하지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 무언가를 자꾸 잊어버린다는 건, 내 삶의 페이지가 찢겨 나가는 상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깜빡거림’의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들은 대개 어제 먹은 반찬, 누군가에게 들었던 섭섭한 말 한마디, 그토록 애태웠던 자잘한 걱정거리들입니다.


반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것들도 많아요. 자식을 향한 애틋함, 배우자의 따뜻했던 손길, 평생을 지켜온 신념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깜빡거림, 즉 ‘망각’은 구멍 뚫린 주머니가 아니라 촘촘한 거름망일지도 모릅니다.

세월이라는 강물에 우리라는 흙을 퍼 담아 흔들면, 가벼운 모래알 같은 거짓과 사소한 오해들은 구멍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섭섭함도 흘러가고, 욕심도 씻겨 내려갑니다. 그렇게 한참을 흔들리고 나면 망 끝에는 묵직한 사금 같은 ‘진심’만 남습니다.

부모님이 자주 깜빡거리시면서도 한결 같이 “오, 윤서방 왔어?” “아들, 어서 와” 하고 웃으실 때의 그 그윽한 미소는 수만 가지 기억을 걸러내고 남은 가장 순도 높은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우리 부부가 가끔 기억해야 할 날짜를 깜빡해도, 서로가 곁에 있어야 할 존재임은 잊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주 깜빡거리는 건, 어쩌면 큰일이 아니라 다행인 일입니다. 복잡한 세상사 불필요한 것들은 잊어주기에, 내 곁에 남은 진짜 소중한 것들이 더 선명하게 빛나는 것이니까요.


기억이 흐릿해지는 건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가장 나다운 알맹이만 남기는 과정이지 않을까요?


오늘도 ‘어김없이’ 무언가를 깜빡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빈자리는 더 따뜻한 진심이 채우고 있을 테니까요. ❤️


_내 마음의 한 문장

“망각은 소중하지 않은 것을 쥐고 있느라,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게 하려는 세월의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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