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기적의 좌표

[ 내마음 사전 ] 129

by 정원에

올해도 어김없이 1월이 찾아왔고, 스물아홉 번째 연말정산을 준비합니다.


이맘때면 마치 손가락이 기억하는 주문처럼, 네 분의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남매의 주민번호를 막힘없이 써 내려갑니다.


처음에는 그저 복잡하고 외우기 힘든 난수표 같았는데, 어느새 이 숫자들은 제 삶의 가장 익숙한 리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니터 속 깜빡이는 커서 위로, 13자리의 숫자가 한명 한명 채워질 때마다 묘한 전율을 느낍니다.


앞의 여섯 자리에는 그들이 이 세상에 도착한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가 태어나신 춘궁기의 쌀쌀한 봄바람, 아내가 처음 눈을 뜬 한여름의 눈부신 햇살, 아이들이 첫울음을 터트리던 그해 봄날의 함박 벚꽃눈 그리고 눈이 시렸던 가을 하늘. 그 숫자를 누르는 순간, 저는 그들이 세상에 처음 존재를 알렸던 그날의 공기와 계절을 상상합니다.


뒤의 일곱 자리, 특히 그 시작점에는 그들이 처음 숨 쉬었던 ‘장소’가 새겨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서쪽 끝 바닷가 마을에서, 누군가는 북쪽의 산골 마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먼 거리와 낯선 시간들이, 굽이치고 흘러 지금 여기, 제 곁에 다 모여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 수많은 시간과 그 넓은 장소의 조합 중에서, 하필이면 이 시대, 이 공간에서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다니요.

주민번호를 입력하는 이 순간은 단순히 소득공제 금액을 확인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각자 다른 고유한 우주를 품고 살아가던 타인들이,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궤도를 돌게 된 그 ‘경이로운 인연’을 재확인하는 시간입니다.

29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숫자들을 반복해서 입력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13자리의 숫자 안에는 우리가 함께 견뎌온 세월의 무게와, 앞으로 함께 걸어가야 할 시간의 약속이 촘촘히 박혀 있다는 것을요.


오늘 밤, 입력 버튼을 누르기 전 잠시 멈칫합니다. 이 건조한 숫자들 사이에 숨겨진, 우리 가족이 이곳에 모이기까지의 그 아득하고도 벅찬 여정을 조용히 쓰다듬어 봅니다. 서로 다른 우주가 만나 한 지붕이 되기까지의 시간들을.


광활한 우주에서 각기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 떨어졌던 별들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지금의 ‘우리’라는 별자리를 이루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기적의 좌표’입니다.


_내 마음의 한 문장

“가족이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출발한 외로운 별들이 기적처럼 궤도를 맞춰 서로를 비춰주는 하나의 은하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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