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모르는 배의 변명
[ 사유가 머문 자리 ] 1
○•_정박된 확신의 비극
항구에 묶여 있은지 오래된 배는 ‘나’다. ‘나’는 바닷 바람에 많이 삭은, 거무스름한 이끼가 가득한 닻을 올릴 엄두를 내지 않는다.
닻이 바다의 깊이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 닻이 그 자리에 박혀 있은 지 너무 오래되어, 그것을 끌어 올리는 데 드는 엄청난 고통과 시간을 감당하기 싫어서일 뿐이다.
무엇보다 그 닻을 주조하는 데 들어갔던 과거의 노력이 아까워, 이제는 녹슬어버린 쇳덩이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상해버린 우유를 단지 비싼 값을 치르고 샀다는 이유만으로 기어이 마시고는 배탈이 나는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녹슨 쇳덩어리 같은 신념이 되어 버렸다.
무언가 ‘옳다’고 주장할 때, 때로는 진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방어기제이다. 진리라고 떠들지만 ‘심리’의 문제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낡은 외투가 몸에 편하기 때문에 다가올 그 어떤 추위도 막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 말이다.
그렇게 결국, 새 옷을 짓는 수고로움보다는, 구멍 난 낡은 외투 속에서 웅크리는 쪽을 택한다. 속박의 정신이 포근한 담요가 되어 그 게으른 선택을 의지와 용기라며 감싸 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속박의 정신으로
영속하는 사물이어서,
짐이 되지 않는 사물이어서,
이득을 가져오는 사물이어서,
많은 희생을 치른 사물이어서
‘옳다’는 결론을 쉽게 내린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녹슨 쇳덩어리의 신념인지도 모른채!
익숙함은 진실을, 진실된 ‘나’를 가리는 가장 화려한 덧칠이다. 당장의 녹을, 낡은 구석을 가린 그 덧칠을 벗겨내지 않는 한, 매일 ‘의심의 학교’로 등교하지 않는 한, ‘나’는 결코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익숙하게 낡은 항구를 떠나 진짜 바다를 만날 수 없다.
그러니, 스스로 거듭 다짐해야 한다. 지금 손에 꽉 쥐고 있는 나침반의 바늘이 요동치는가, 멈추었는가. 아니면, 혹시 바늘이 아예 없는 엉터리 나침반에 시간을, 돈을, 정신을 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확신은 감옥이고, 의심은 열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