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도 아는 배우

[ 사유가 머문 자리 ] 6

by 정원에

○•_삶의 유연성에 대하여

가장 숭고하고 엄숙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우주의 고뇌를 짊어지다가, 막이 내린 직후 슈퍼에 들려 ‘인디언 밥’을 덜렁거리며 들고 퇴근하는 모습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위대한 균형감각이다.


하늘을 나는 법을 아는 새만이 땅에 내려앉아 가느다란 다리에 의지한 채, 제대로 걸을 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먹고 사느라’는 변명을 멈추어야 한다. 삶은, 무대 위의 ‘형이상학’과 무대 아래의 ‘밥벌이’ 사이에 늘 거대한 낙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건강한 영혼은 이 아찔한 높이 차이를 공포가 아닌 미끄럼틀처럼 즐긴다. 낮에는 올림포스의 제우스가 되었다가도, 퇴근길 지하철 환승 구간에서는 인간들과 부대껴서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게 당연하다는 것. 이 사실을 긍정할 때, 삶은 비로소 유쾌해진다.


이쪽 세계(이상)에 매몰되어 저쪽 세계(현실)를 멸시하는 것은 철없는 자기애이다. 저쪽 세계에 짓눌려 이쪽 세계를 잊는 것은 무책임한 태만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한, 움직일 수 있는 한 언제나 한 손에는 운명에 저항하는 대본을, 다른 한 손에는 할인 쿠폰을 단단히 움켜 쥐자.


익숙하지만 늘 거북한, 때로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라도 무대 뒤를 잊지 않으면 된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삶이라는 무대를 장악한 자만이 가진, 삶에 진짜 필요한 유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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