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라는 이름의 냉동고를 비우며

[ 내마음 사전 ] 134

by 정원에

오랜만에 집 안을 뒤집었습니다. 대청소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나를 둘러싼 껍질들을 벗겨내는 일이었습니다. 짐을 정리하다 보니 비움의 행위에도 참 다른 두 가지 온도가 있더군요.


하나는 책장 앞에서였습니다. 몇 년째 펼쳐보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들. 분명 지금의 나에겐 필요 없는 문장들인데, 선뜻 버리기가 망설여집니다.


‘언젠가 다시 읽지 않을까?’, ‘이건 추억인데...’ 하며 자꾸만 미련이라는 꼬리표를 답니다. 버려야 한다는 이성과 간직하고 싶다는 감성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죠.


반면, 냉동실 앞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싸매 둔 정체불명의 덩어리들, 언제 무엇을 얼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음식들. 그것들을 쓰레기봉투에 털어 넣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오직 하나, ‘후련함’입니다. 과감하게 비워낼수록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죠.


우리의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저장’하는 일에 몰두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머릿속 책장에는 언젠가 빛날 것 같은 지식을 꽂아두고, 마음의 냉동고에는 차마 꺼내 놓지 못한 무거운 감정들을 꽁꽁 얼려둡니다. 하지만 비워진 책장과 텅 빈 냉동고를 마주할 때 찾아오는 그 ‘서늘한 평화’는, 채움보다 비움이 우리를 더 온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러줍니다.


책장 앞에서 망설였던 그 마음은, 아마도 과거의 나를 놓아주기 싫은 애틋함이었을 거예요. 그 문장들은 당시의 나를 지탱해주던 지팡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지팡이를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내 두 발로 오롯이 걷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미련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공간을 미리 가불해 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아픈 감정을 얼려두면 안전할 거라 믿습니다. 슬픔을 냉동실 깊숙이 밀어 넣으며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꺼내어 달래주자>고 스스로를 다독이죠. 하지만 얼음은 감정을 보존해주지 않습니다.


단지 그 형태를 딱딱하게 굳혀, 우리가 만지기 두렵게 만들 뿐입니다. 마음의 전원 코드가 잠시 뽑혔을 때 흘러나오는 그 눅눅한 냄새는, 사실 <제발 나를 좀 봐달라>는 상처 입은 마음의 마지막 비명이었을 거예요.


냉동고를 비워내며 느꼈던 그 후련함은, 단순히 쓰레기를 버린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에 ‘새로운 계절’이 들어올 자리를 허락한 안도감입니다. 묵은 감정을 덜어낸 자리에는 이제 갓 구운 빵의 온기 같은 평온함이 들어찰 것입니다. 그때그때 마음을 요리하고, 남은 것은 미련 없이 흘려보내는 일. 그것이 나를 가장 신선하게 유지하는 최고의 비결임을 배웁니다.


어쩌면 우리는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비우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텅 빈 공간은 결코 허무가 아니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니까요. 휑한 냉동고를 보며 왠지 모를 서글픔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드는 저녁이었습니다. ❤️


_내 마음의 한 문장

“마음의 냉동고를 비우는 일은, 차갑게 굳어버린 어제의 나를 녹여 따뜻한 오늘의 나로 안아주는 소중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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