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뜸'의 미학

[ 사유가 머문 자리 ] 10

by 정원에



○•_‘카이로스’의 춤사위

가성비와 효율이 인생의 ‘주어’처럼 된 세상에서 인간은 자꾸만 결과값으로 자신의 증명을 대신하려 한다.


질문을 던지자마자 답을 내놓는 기계의 속도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중간 과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최대한 빨리 벗겨내야 할 불순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통과했는가>라는 눅눅한 정성 속에 숨어 있다.


인간의 삶은 늘 목적이라는 정상을 향해 수단이라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형국이다. 하지만 목적지에만 매몰된 경우라면 ‘지금, 여기’라는 시간은 미래의 보상을 위해 저당 잡힌 ‘멀미 나는 대기실’에 불과하다. 마치 3분 만에 익는 컵라면을 휘저으며 장인의 깊은 육수 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모순 속에 사는 것만 같다. 설익은 면발을 탓하느라 물이 끓고 면이 퍼지는 그 ‘기다림의 미학’을 망각한 것이다.

삶의 맛은 목적지에서 터지는 샴페인이 아니라, 솥 안에서 뭉근하게 익어가는 ‘뜸’의 농도에서 결정된다. 이런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과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구분한 이유이다. 수단을 단순히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부린다면 우리는 평생 크로노스의 노예로 살 뿐이다.


비바람을 맞으며 밤낮으로 흙을 만지고 잎을 닦는 농부의 손길처럼, 수단 그 자체에 숭고함을 부여하는 순간 지나치기만 하는 정신없는 도로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무도회장으로 변모한다. 즉, 과정이 곧 존재의 증명이 되는 것이다.


진심을 다해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목적 달성은 쟁취해야 할 전리품이 아니라,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마주할 기대된 풍경이다. 밥이 설익었다고 솥을 걷어 차는 대신 불의 온도를 조절하는 그 여유로운 단호함, 실패를 실패라 부르지 않고 ‘아직 뜸이 드는 중’이라 말하는 그 뭉근한 낙관이야말로 인간의 품격을 올리는 예술적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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