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하늘을 지우는 법
[ 사유가 머문 자리 ] 11
○•_창틀의 모양에 대한 인식
세상은 언제나 보는 만큼 존재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좁은 창문을 하나씩 품고 산다. 그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사각형 창틀을 가진 이는 하늘을 네모라고 정의한다. 원형 창을 가진 이는 우주가 둥글다고 확신한다. 각자의 창가에서 내뱉는 확신은 때로 진리라는 가면을 쓴다. 그러나 창틀의 모양이 하늘의 윤곽이 될 수는 없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안락한 감옥이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명쾌하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내 귀에 들리지 않는 파도 소리는 소음조차 아니다. 하지만 진실은 창틀 너머 무한한 여백에 있다.
우리는 늘 부분을 보며 전체를 안다고 착각한다. 이 착각은 삶을 단단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타인의 세계를 부정하게 만든다. 삶에서 실천해야 할 태도는 명확하다. 자신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창틀에 먼지가 끼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고백은 지혜의 시작이다. 옆집 사람의 창문에는 내가 보지 못한 노을이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끔은(때로는 아주 자주) 내 창틀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혹시 창유리에 색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가. 붉은 안경을 쓰고 온 세상을 향해 <왜 이리 붉기만 하냐>며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닌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자신의 눈에 낀 편견의 찌거기를 닦는 일이다. 어쩌면 신은 인간에게 각기 다른 창을 주며 유머를 즐기고 계실지도 모른다. 서로의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을 공유하며 웃으라는 뜻일 게다.
진정한 소통은 자신의 창문을 부수는 파괴가 아니다. 상대방의 창가로 건너가 그가 보는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용기다. 하늘은 결코 네모나지도, 둥글지도 않다. 하늘은 그저 비어 있음으로써 모든 모양을 품는다.
이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좁은 방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세상은 내가 본 것보다 언제나 광활하며, 그 광활함이 곧 우리의 자유다. 진리는 창틀의 모양이 아니라, 그 너머를 흐르는 바람의 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