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식이요법을 생각하며

[ 내마음 사전 ] 137

by 정원에


작은 액정 너머로 웃음소리가 번집니다.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하나의 전공 과정을 잘 마친 딸을 축하하는 자리. 그 곁에는 우리 돈으로 2만원 가까운 귀한 막걸리 한 병을 챙겨 온 오빠가 든든하게 앉아 있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각자의 식탁 위에 같은 마음을, 그리고 같은 술을 올려두고 잔을 부딪칩니다. 화면 속 아이들의 모습은 거울처럼 나를 비춥니다.


채 두 잔도 비우지 못했는데, 딸의 얼굴은 잘 익은 칠월의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었거든요. 물론 아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붉음은 숨길 수 없는 우리 집안의 내력입니다. <아빠를 닮아서 그렇다>는 핀잔 섞인 농담 속에 묘한 안도감이 스며듭니다. 술을 이기지 못하는 그 정직한 신체가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졌거든요.


그렇게 딸과 아들의 붉은 뺨을 바라보다 문득, 나의 젊은 날이 겹쳐 보입니다. 그 시절의 나는 나약함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몸이 거부하는 술을, 영혼이 거부하는 세상을 억지로 삼키곤 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지기 싫어서, 술에게도 세상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달려들었습니다.


쓰디쓴 알코올로 속을 씻어내면, 세상의 비정함 따위는 무디어질 것이라 믿으며 나 자신을 혹사시켰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삶의 항체’를 만드는 과정이라 믿었던 가 봅니다. 독을 삼켜야 독에 대한 면역이 생긴다고 착각했던 것이지요.


붉어지는 얼굴을 억지로 감추며, 취하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버티는 것이 어른의 강인함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습니다. 진정한 항체는 독을 견디는 능력이 아니라, 나에게 해로운 것을 알아채고 밀어낼 줄 아는 지혜라는 것을요.


딸아이의 붉어진 얼굴은 <이제 그만>이라는 몸의 솔직한 신호입니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려는 생명의 건강한 반응입니다. 젊은 날의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항체는 억지로 들이키는 객기가 아니라,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뒤늦게나마 ‘정신의 식이요법’을 시작하려 합니다. 지나친 욕심,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세, 나를 갉아먹는 경쟁심 같은 고열량의 감정들을 식단에서 제하기로 합니다. 대신 소화하기 편한 담백한 진심과, 내 몸에 맞는 속도의 평온함만을 섭취하려 합니다.


화면 속 남매들이 웃습니다. 술기운에 붉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에 달아오른 것처럼 보입니다. 더 이상 마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취해 있으니까요. 서로를 닮았다는 확인만으로도 새벽 2시와 저녁 7시는 따스한 연결감으로 가득합니다.


억지로 강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밤, 나의 아이들이 그들의 붉어진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나 또한, 이젠 억지스러운 싸움을 멈추고 내 안의 고요와 화해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



_내 마음의 한 문장

“진정한 삶의 항체는 고통을 무작정 견디는 굳은살이 아니라, 나를 해치는 것으로부터 단호히 등을 돌릴 줄 아는 '마음의 소화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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