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by 홍진명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저자: 가토 요코

출판사: 서해문집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는 사학자 가토 요코 교수가 07년 말부터 이듬해 설에 걸쳐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5일 동안의 강의를 토대로 한다. 가토 요코 선생은 30년대 일본 전쟁사 연구의 권위자로 도쿄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일본 사학계의 진보 인사로 유명하다. 본 저서는 구어체 형태로 가독성이 높으며 배경 지식이 없어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원제는 <그럼에도 일본인은 전쟁을 선택했다(それでも, 日本人は‘戰爭’を選んだ)>인데 국내 출판 제목은 왠지 전쟁의 주체가 일본이란 국가이며 내부 구성원인 일본인들은 마치 피동적으로 끌려다닌 입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면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때론 구성원 전체가 일본의 전쟁을 지지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일본인들은 결코 전쟁과 동떨어진 객체가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전쟁의 주체이며 곧 일본 사회 구성원이었음을 책은 자세히 보여준다.


본서는 서장을 시작으로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대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2차대전까지 일본 제국 시절의 굵직한 전쟁들을 파트 별로 다룬다. 서장에서 저자는 ‘전쟁은 상대국의 헌법을 바꾸는 행동’임을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말을 빌려 주장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1889년의 대일본제국 헌법 제1조를 보면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만년의 세월 동안 하나의 혈통이 계승된 신성한 존재인 천황이 일본의 지배자란 의미다. 일본은 무가 정권의 수장인 쇼군이 다스리던 막부와 교토의 천황이 다스리던 이중 권력이 공존하는 사회였다. 유신 세력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존립한다는 존황의 기치를 내걸었다. 따라서 천황을 새로운 일본의 구심점이자 상징적 존재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해당 국가의 헌법 1조는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처럼 대일본제국의 헌법은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만들었고, 정치와 군대의 부조리를 천황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당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세력의 거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독자 개념을 제시했다. '주권선'은 자국이 실효 지배하는 영토의 국경선을, '이익선'은 국경에서 떨어진 지역에서도 국가의 이익이 미치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일본 영토가 일본의 주권선이라면, 한반도, 대만, 만주는 일본의 이익선으로 규정한 야마가타의 논리는 일본의 제국주의 사상 성립에 기여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한편으론 한반도 병탄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대외 진출 과정에서 청나라와 충돌한 사건이 1894년과 95년에 걸쳐 일어난 ‘청일전쟁’이다 청나라는 전쟁의 패배로 대만과 랴오둥 반도를 일본에게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영국, 러시아, 프랑스 삼국의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했다. 삼국간섭은 일본의 민의가 반영되지 못해 외교를 바르게 할 수 없는 것이란 자국내 불만을 야기했다. 국민들이 널리 선거권을 갖는 보통선거운동이 이 시기 일어났다.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는 유럽 열강이 이권을 나눠 갖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모한다. 러시아는 만주 지역 철도 부설권 확보, 뤼순, 다롄을 조차해 얼지 않는 부동항을 얻고자 하는 야욕을 보였다. 극동 지역 패권 확립과 태평양 진출 야욕을 드러내는 러시아의 행보는 경쟁자 영국의 심기를 거슬렀다. 동아시아 열강이 되려는 일본 입장에서도 묵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시대의 대리전 성격을 띄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유대계 자본으로 막대한 차관 제공으로 러시아와의 일전에서 승리했다.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에게 만주의 권익을 전부 할양하고 한반도에서 탁월한 이권을 가짐을 약속했다. 조선의 자주권을 열강끼리 제멋대로 획책하는 순간이었고 조선은 1910년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다.


러일전쟁은 한편 일본이 훗날 2차대전에서 패망하게 되는 중요한 전훈이 싹틔운 전쟁이기도 하다. 일본군은 러시아군 방어선에 끊임없이 병력을 투입해 승리를 거뒀다. 이는 훗날 인명 경시 풍조, '반자이 돌격'과 같이 무분별한 진격으로 병력을 희생하는 ‘백병돌격주의’가 육군의 전술 기조로 자리잡는다. 해전에서는 큰 군함과 큰 대포가 전투의 향방을 가른다는 '대함거포주의' 사상이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한 번의 결전을 승리해 전쟁을 결정짓는다는 ‘함대결전주의’ 사상은 2차대전에 이르러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의 강력한 전쟁 수행 의지, 거대한 경제력에 기초한 공업력을 무시하고 일본의 대전략을 단기전이라는 좁은 시야에 갇히도록 만들었다. 당시 일본의 승리 방정식은 불완전했지만 러일전쟁의 전훈을 ‘황국독특’이라는 일본 고유의 교리로 만듦으로써 외국의 사례를 받아들여 수정 보완해나가는 개방성을 잃어버린다.


유럽에서 발발한 1차대전에서 일본은 연합국에 편승해 승전국이 된다. 유럽에서 일진일퇴 중인 독일의 부재로 무주공산이 된 독일령 산둥반도와 남양군도 통치권을 위임받고, 사할린 남부를 점거한다. 일본은 안전보장을 우선순위로 두고 식민지를 점거했다. 열강과의 전쟁 발발 시 해군의 근거지로 삼고자 하는 전략적인 안보상의 판단하에서였다. 또한 칭다오를 포함한 산둥반도의 권익을 확보해 기존에 일본이 점유한 만주 일대의 철도와 연결, 유사시 중국을 침공하는 동맥으로 활용코자 했다.


일본은 1차 대전의 승전국이었음에도 변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이는 ‘국가개조론’이 등장한 배경이 된다. 러일전쟁 후인 1907년에 수립된 ‘제국국방방침’은 이러한 위기의식 하에 2차례 개정된다. 첫 수립 당시 가상적국, 즉 주적은 전면전을 벌인 러시아로만 국한됐다. 이후 1918년 제1차 개정 시 가상 적국은 러시아, 미국, 중국. 1923년 2차 개정 시 가상 적국은 미국으로 변경된다. 1차대전 초입부터 같은 연합국인 미국이 중국의 소란에 일본 정부가 개입 시 사전에 미국 정부와 협의하길 요구했는데, 일본은 이를 주권 침해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1915년 중국의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를 관철해 중국의 이권을 빼앗은 사실이 열강들로부터 격렬하게 비난받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의 사례도 등장한다. 바로 3.1 운동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면서 군인과 헌병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무단 통치를 시행했다. 무단 통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불만을 가중해 1919년 3월 1일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일제는 3.1 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공교롭게도 3.1 운동은 파리강화회의 와중에 일어났고 파리회의와 미국 상원에선 일본의 한국 지배가 가혹하다는 논쟁이 벌어졌다. 가혹한 통치를 하는 일본에 새로운 영토를 위임하는 위임통치를 맡겨도 좋은지까지 논의가 확장됐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중국 내 권익을 지켰으나 국가 정체성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계기가 됐다.


중국의 혼란과 1917년 제정러시아가 붕괴하고 소련이 성립된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고 일본은 노골적으로 만주와 몽골 일대, 즉 만몽의 권리를 탐냈다. 일본은 만몽 문제를 특수 권익이 걸린 생존권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대만몽 투자 비율 중 85%가 일본 정부의 자금이었다. 일본 정부는 만철이라 불린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사실상 국가가 관리하는 수족처럼 이용했다.


정부의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으므로 일본의 의원 마쓰오카 요스케는 1930년 12월 개회한 통상회의에서 “만몽은 우리나라의 생명선이다”라는 발언을 하며 쉬쉬하던 일본의 입장을 밝혔다. 만주 일대의 권익을 내세우며 전쟁의 도화선은 타들어 갔다. 이 시기 도쿄대생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를 보면 만몽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90퍼센트가 ‘그렇다’고 대답한다. 일본군은 농촌과 도시의 빈민들을 구제하는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했다. 일반적인 도시민이나 대학생 계층은 후진적인 일본군 병영 문화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당시엔 일본 최고 엘리트인 도쿄대생조차 전쟁과 군대를 지지할 정도의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여론 선전은 주로 일본 군부에 의해 이뤄졌으나 정작 군부는 만몽의 이권 문제엔 큰 관심이 없었다. 일본 육군의 진짜 목적은 만몽을 미국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한 전초기지화였을 뿐이다. 군부의 권력은 너무나 막강하여 내각이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일본 내 양대 반전세력이었던 공산당은 정적 숙청의 다른 이름이었던 1925년 시행된 치안유지법으로 대부분 검거된 상황이었으며, 무산정당은 대공황의 여파 아래 참전 용사의 이권 보장으로 타협했다.


장제스에 의해 만몽 문제가 국제연맹에 제소되었다. 일본 정권과 몇몇 군 간부는 강경한 태도로 허세를 부리며 협상을 꾀했다. 허나 일본 육군이 중국의 러허성을 침공하며 상황이 꼬이는 바람에 일본은 스스로 국제연맹을 탈퇴하기에 이른다. 1937년 중일전쟁이 개전 되고 일본은 3개월 만에 중국 전토를 함락하리라 자신했지만 전쟁은 장장 4년간 이어진다. 일본은 장기전의 원인을 미국, 영국, 소련의 중국 원조라 판단했다. 원조 루트는 남쪽에서부터 시작했기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함락해 이를 봉쇄하고자 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주둔하는 정도로는 미국의 경제제재가 없으리라 여겼다.


미국은 즉시 경제 봉쇄를 단행했다. 전략물자인 석유와 기타 자원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던 일본의 전시 경제는 마비될 위험에 처했다. 일본은 경제 위기를 타개하고자 전국시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착안한 기습을 통한 단기결전을 기획했다. 당시 세계는 2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일본은 독일과 소련 사이를 중재해 독일이 서부 전선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영국을 굴복시킨다면, 미국의 전쟁 수행 의지 또한 약해지리라 낙관했다.


몽상에 가까운 계획을 착안한 일본은 무방비 상태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명명된 사건이자 태평양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일본의 열두 배, 중화학공업과 철강 역시 열두 배, 자동차 보유 대수 160배, 석유 776배의 압도적 격차가 났다. 1941년 일본이 비밀리에 설립한 총력전연구소의 연구 결과로 일본은 개전 이전부터 절대 미국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일본은 ‘임시군사비특별회계’를 편성해 정부 예산을 전시를 대비하는 군사비로 회계처리해 개전 초기 미국의 전력과 겨우 구색을 맞췄다. 군부의 구상대로 조기에 전쟁을 결착하면 미국과 협상까지 이어지리라 착각했다. 미국의 분노와 전쟁 의지를 완벽히 간과한 일이었다. 일본은 압도적인 미국의 국력을 실감하고 패전하게 된다.

본서는 각 전쟁 별로 세부적인 전투 개요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대 일본 국내 정치 환경과 세계 외교 흐름을 분석해 일본의 전쟁 흐름을 짚어주는 정치외교학 저서에 가깝다. 일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록이라 본국 사람은 더 깊게 와닿는 구체적인 흐름이 외국인 입장에선 어려울 수 있겠다. 하지만 배경 지식이 없어도 읽기에 문제되진 않았다. 전체 내용을 조망하면서 공부하느라 제법 시간이 소요됐다. 정리하면서 군데군데 빠진 부분도 있으나 책 전반을 개괄함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본서는 당대 일본의 외교적 선택과 그 사회의 구성원인 일본인들이 전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때로는 전쟁을 지지하고 찬동했기에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한다. 일본 현대사를 공부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권하고 싶은 대단한 명저다. 관심 있는 분들의 필독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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