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식사를 마치고 동화책을 폈다. 동생이 골목에서 누군가 버린 동화책을 아빠에게 읽히겠다고 주어온 것이었다.
“아빠, 이거 봐봐. 조물조물 쿠키를 만들어요.”
“조물....”
“그렇지~ 조물조물 쿠키를.”
갑자기 아빠가 산만해 보이더니 배가 아픈지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옆에 서있던 나에게 뭔가 뜨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소변인가, 의자 밑을 쳐다봤더니 별일 없이 말끔했다. 그런데 뭐지? 분명히 따듯한 기운이었는데.
“오줌 싸고 싶어? 화장실 갈까?”
아빠를 일으켰다. 이런, 치마(고무줄 치마가 여러모로 관리가 편해서 요새 아빠는 치마를 입고 있다) 엉덩이 부분에 황토색 얼룩이 져있었다. 똥이다. 앉은 채로 똥을 쌌구나. 화장실로 모시고 가려고 급히 몇 걸음 걸었더니 갑자기 팔뚝만 한 똥이 마룻바닥에 투욱 떨어진다. 묽은 똥은 다리를 타고 내려와 슬리퍼에 담기고 있다. 야단 났다. 기저귀에서 잠시라도 해방시켜 주고 싶어서 벗겨둔 게 화근이었다. 아침부터 차가운 푸룬 주스를 먹였더니 효과가 직방으로 나타났나 보다. 최근엔 이렇게 말도 없이 대변을 봐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움직이지 않겠다고 버티고 선 걸 겨우 겨우 화장실로 모시고 갔다. 2시간 전에 목욕을 뽀얗게 다 시켰는데... 똥 묻은 치마를 안 벗겠다며 꽉 붙들고 고집을 부린다. 방에서 일하고 있던 동생을 불렀다. 동생이 아빠 앞에서 손을 붙들고, 나는 뒤에서 치마를 내렸다. 비누로 거품을 내서 엉덩이며 다리며 싹싹 문질러 씻겨냈다.
“으~ 아빠~ 이게 모야. 오줌싸개는 괜찮은데, 똥싸개는 안돼~”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 볼 수 없었지만 맞은편에 있는 동생 얼굴이 상상되었다. 미간을 모으고 눈을 가늘게 한 후 입술을 판판하게 하고 있을 얼굴이. 피식 웃음이 났다. 아빠가 아무 데나 똥 싸는 건 피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아빠를 알면서 간절히 부탁하듯 얘기하고 있는 동생. 그 간절함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혼자서 이 사태를 맞이했다면 난 울고 싶었을 거다. 똥으로 범벅이 된 옷을 안 벗겠다고 버티는 아빠와 실랑이하고 어렵게 씻기고 저걸 다 손빨래하고 지뢰연발이 되어 발 디딜 곳 없는 거실을 혼자 치워야 했다면 힘들다 못살겠다 어두운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을 거다.
“하하. 나 혼자 해결했으면 눈물 났을 거야.”
“맞아. 우리 둘이 같이 있으니 다행이야.”
“내가 아빠 씻기는 거 마무리할 테니깐 넌 가서 마루를 좀 치워줘.”
뒤처리는 다른 것 보다 냄새 때문에 고역이었다. 외할머니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서울-전라도를 오가며 간병을 했던 엄마 말을 떠올렸다.
“우리 엄마 똥이니깐, 하나도 안 더러웠다. 뭐 그게 더러워?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내 똥 기저귀 다 빨아주고 치워줬는데. 우리 엄마 똥인데 뭐가 더러워.”
그래 남의 것이 아니라 아빠 똥이니깐 참을 수 있는 거지. 부모님은 내가 아가일 때 기저귀에 싼 똥을 보고 안도했겠지. 시기에 맞춰 똥을 제대로 싼 것만으로 부모에게 기쁨이 되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더럽다 그냥 내버리지 않고 그 모양을 살피면서 건강을 체크하고 어느 때는 내 배를 따뜻한 손바닥으로 문질문질 쓸어줬을 것이다.
아빠는 점점 아이처럼 되어간다. 혼자서는 먹고 싸고 잘 수 없는 갓난아이의 모습이 되고 있어서 누군가의 손길이 곁에 있어야만 한다. 나이가 들며 아이의 모습처럼 되어가는 이것이 자연의 정해진 순리라면, 자연은 부모의 생존을 돕는 역할을 자식으로 염두에 둔 건 아닐까. 우리가 자라날 때 돌봄을 담당해 줄 이가 부모밖에 없었던 것처럼 지금 나이 든 부모 곁에는 자식 밖에 없으니 말이다. 자연은, 부모가 자녀를 키우고 또한 자녀에게 그 기억을 남겨서 부모를 돌보는 것을 하나의 순리로 보고 인간의 생로병사를 설계해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눗물을 거실 바닥에 끼얹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아빠는 내가 바닥을 걸레로 닦자 앉은자리에서 새초롬한 까치발을 한다. 작은 방에서 동생이 고객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똥을 치우다 목소리를 싹 바꿔 바로 생업 모드로 전환이다. 아빠를 집에서 모시는 비용을 마련하고자 동생은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
다 치웠다. 뒷정리를 하느라 고생스럽긴 했지만, 다행이다. 변을 제대로 못 봤다면 아빤 식사도 제대로 못했을 것이다. 똥으로 사고 치는 똥쟁이 아빠는 피하고 싶었지만 이젠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나 보다. 점차 몸의 기능이 잠들어가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