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경사로에 골목골목 낮은 집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동네.
어머니가 집을 나간 후 아버지와 우리 세 딸은 이곳 작은아버지네 아래층으로 이사를 했다. 작은아버지는 이혼을 하고 나와 동갑인 딸 H와 그보다 두 살 많은 아들 T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평소에는 좋은 분이셨지만 한번 발동이 걸리면 정신을 잃고 몇 날 며칠 술을 마시며 폐인처럼 지냈다. 인사불성이 되어 골목 어귀에 쓰러져 있을 때면 이웃들은 내 사촌들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제 몸집보다 큰 작은아버지를 끙끙대며 집으로 모시고 오곤 했다.
우리는 사춘기를 함께 보냈다. 자주 모여 같이 밥을 먹고 볼품없는 똑같은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다. 다사다난한 가정사를 농담거리로 삼아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는데 생각해 보면 이는 우리 나름대로 상처를 끌어안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함께 견뎠다. 특히 나와 동갑인 H는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T와 H가 상황이 어려워져 작은 어머니네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 5년 정도를 더불어 살았다.
거리가 멀어졌어도 서로 잘되기를 응원하고 작은 성취들을 함께 축하하며 각자 인생의 길을 걸었다. 우리는 거창한 무언가를 이루진 못했지만 부지런하고 진실하게 살았다. 사는 게 바빠 소원해질 때도 있었지만 항상 서로의 안위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 아버지의 치매를 알아차린 것도 H였다. 매일 아버지를 보며 무감각해져 있던 우리에게 병원에 모시고 가보라고 조언해 준 H덕에 치매를 빨리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치매 진단 후 10년 동안 아버지 간병을 하며 지쳐있는 우리 자매에게 현실적인 조언과 도움을 가장 많이 준 사람도 H와 T였다.
설 연휴 T오빠에게 카톡이 왔다.
“이런, 또 한 살을 먹어버렸군. 지난 한 해보다 다가오는 한 해가 더 나은 시간이 되기를 기원하마~^^. H와 함께 응원의 마음을 담은 약간의 지원금을 통장으로 보냈으니 부디 아무 부담 없이 받아주길 바란다.”
통장을 확인해 보니 백만 원을 보내왔다.
돈이, 백만 원이 이토록 다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내 인생에서 받아본 돈 중에 가장 다정한 돈이었다.
돈을 허투루 쓰는 일이 없던 검소한 H에게 백만 원은 큰돈이었을 것이다. 이 돈은 타지에서 혼자 살며 직장생활을 하는 H의 외로움의 삯이고, T가 코로나 시기 학원 강사 일을 하며 아등바등 버텨낸 몫이다. 본인들 부모님 노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처지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선뜻 우리에게 보내온 백만 원과, 그보다 더 큰 마음이 고마웠다. 힘내라고 우리도 함께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동생과 함께 감사의 전화를 했다.
마음 붙일 곳 없던 T가 가출을 결심했던 어슴어슴한 새벽녘, 퇴근하고 돌아온 내 아버지가 평소보다 큰 가방을 멘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어디 가냐 담담히 물으며 마음을 돌이켜 주었다고 했다. H는 초등학교 등록금이 밀려서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내 아버지가 등록금을 내준 일을 얘기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온기 품은 씨앗이 밭에 심겨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내듯, 타인의 삶 한 자락을 끌어안았던 작은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낸다.
지금의 아버지를 지키는 것도 아버지가 딸들과, 주변 사람들 마음에 뿌려둔 씨앗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촌들의 응원도 온기 품은 씨앗이 되어 내 마음에 뿌려졌다. 견딜 수 없이 추운 날엔 그 씨앗을 바라보며 힘을 내 견디고, 소중히 품고 키워 씨앗을 뿌린 그들에게 향기를 내어 보답하고 싶다. 우리 자매들도 잊지 않고 훗날 사촌들에게 힘든 시기가 찾아오면 곁에, 다정하게 함께 서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