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기울지 않는 마음은 온전한 평화일까
사랑은 인간이 가진 가장 찬란하면서도 잔인한 감정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늘 위험을 동반한다. 상대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받지 못한 감정에 대한 결핍, 사랑이 변질되거나 끝났을 때 남는 상처. 사랑은 행복의 시작인 동시에, 고통의 근원이다. 그래서 어떤 사회는 고민했다. 만약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훨씬 평온해지지 않을까.
그 사회에서는 사랑이 사라졌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전에만 남아 있고, 사람들은 그 단어를 낭만이 아니라 비효율로 분류했다. 결혼은 생물학적 호환성을 기준으로 매칭되며, 자녀는 정해진 인공 배양소에서 태어난다. 인간관계는 합리적인 계약으로 유지된다. 감정이 아닌 기능으로 이어진 사회. 누구도 실연하지 않고, 누구도 사랑 때문에 울지 않는다.
처음엔 모두가 평화로웠다. 연인 사이에 따라다니는 이별의 고통도, 질투도, 집착도 사라졌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생기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도 사라졌다. 질투와 기대가 뒤섞여 생기던 친구 사이의 흔들림마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이 사라지자, 세상은 조용해졌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감정이 사라지자, 함께 있는 이유도 사라졌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플라톤은 [향연]에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영혼의 운동이라 설명했다. 사랑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욕망이다. 사랑은 결핍에서 비롯되고,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이 채워질 때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불안하다. 충만함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다시 불완전한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어진 사회는 바로 그 결핍을 제거한 사회다. 모두가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기에,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완전함 속에서, 인간은 이상할 정도로 외로워졌다. 사랑이 사라진 사회의 사람들은 고독을 느끼지 않는 대신, 무의미를 느낀다. 고독은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생기지만, 무의미는 아무도 그립지 않을 때 생긴다. 그 차이는 아주 크다.
사랑은 불안정하고 위험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함께 존재하고 싶다는 갈망은 문명 전체를 이끌어왔다. 예술은 사랑을 바탕으로 발전하고, 시와 음악은 그 울림 속에서 만들어졌다. 사랑이 사라지면 예술도 급격히 빈곤해진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가상의 작곡가 방테유(Vinteuil)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으며 첫사랑과의 행복한 추억을 떠올린다. 음악은 그에게 과거의 감정이 다시 숨을 쉬는 순간을 마련해준다. 어떤 감정은, 말로 기억되지 않고 감각 속에 저장된다. 그래서 기억은 언제나 감정의 흔적을 통해 되살아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 속에 새긴다는 뜻이다. 사랑이 사라진 사회는 결국 기억이 얕아지고, 추억이 없어진 사회다. 감정이 없는 기억은 단순한 데이터에 불과하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상처와 맞닿아 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언제든 상처받을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 중 가장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비합리함 때문에 인간다워진다. 이성과 계산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랑은 시스템 오류로 취급된다. 그 오류가 제거된 세상은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온도가 없다. 사람들은 서로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관계는 매끄럽지만, 생명은 없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 미소 짓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눈물을 보이지만, 그들의 눈빛은 비어 있다. 감정이 아닌 반응만 남은 얼굴은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마음을 알 수 없는 인형과 닮았다. 그래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에는 따뜻함 대신 효율만이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좋아한다는 말 대신 당신은 나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 사랑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를 계산의 언어가 채운다. 이익이 끝나면 관계도 끝나며, 그때의 상실은 슬픔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남는다.
누군가는 사랑은 불필요한 감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관계의 이유가 사라진다. 타인을 향한 감정이 사라지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룰 동기를 잃는다. 문명은 이성으로 세워졌지만, 지속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사랑은, 인간이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통로였다.
사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행위이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에서 시작되지만, 의지로 유지된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 교환이지만,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려는 결단이다. 즉, 사랑은 인간이 자기 이기심을 넘어 타인을 향해 나아가려는 가장 근원적인 실험이다. 그 실험이 사라진 사회는 결국 자기 자신만 남은 사회다. 모두가 자신에게 충실하지만, 아무도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사랑의 부재는 곧, 공감의 부재이기도 하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이 없다면 타인의 아픔은 통계로만 존재한다. 누군가가 다쳐도, 죽어도, 슬퍼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언어를 잃는다. 단지 ‘아프겠다.’라고 머리로 알 뿐. 결국 그 사회는 고통도, 위로도, 기억도 사라진 사회가 된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다. 무관심이다. 미움 속에는 여전히 감정이 불꽃이 있다. 무관심 속에서는 아무것도 타지 않는다. 사랑이 사라진 세상은 완벽한 무관심으로 유지된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지만, 아무도 누군가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 평화는 냉정한 평형 상태이다.
존 비비어는 저서 [두려움]에서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은 두려움에 맞서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다. 죽음, 상실, 시간의 덧없음 속에서도 인간이 계속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없어진 사회에서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 같지만, 사실 그 반대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자신만 남게 되고,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시작된다. 사랑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잊을 드문 기회다. 그 기회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영원히 자신에게 갇히게 된다.
우리는 사랑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안다. 그 감정은 종종 우리를 무너뜨리고, 때로는 사람을 가장 이기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사랑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상처이자 인간의 증거다. 그 증거를 지워버린 세상은 겉보기엔 완벽하지만, 인간의 살아있음을 증명할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사랑이 사라진 세상은 덜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 덜 아픈 세상은 덜 살아있는 세상이다. 진짜 유토피아는 사랑이 없는 평화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흔들리고 아파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평화다.
<사랑에 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들>
1. 사랑에 빠지면 뇌는 통증을 덜 느낀다. 연구에 따르면 로맨틱한 사랑을 느끼는 순간 뇌의 보상 회로인 도파민 시스템이 활성화되면서 통증 지각을 낮추는 진통 효과가 실제로 나타난다.
2. 사랑은 중독물질과 유사한 뇌 활동을 만든다. 사랑에 빠진 초기 단계에서는 도파민, 옥시토신, 노르에피네프린 등이 집중적으로 분비되는데, 이 패턴은 코카인, 니코틴 등의 중독 기전과 유사한 뇌 활성 패턴을 보인다. 초반 사랑이 몰입적이고 강렬한 이유의 신경학적 근거다.
3. 사랑하면 건강해진다. 사랑은 면역력 향상과 연결된다. 안정적이고 만족도 높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염증과 관련된 사이토카인 수치가 낮고, 면역반응이 더 건강하다는 연구가 있다.
유토피아 실험실 - II. 인간성, 감정의 결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