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설명할까
일은 인간의 하루를 점령한다. 우리는 사회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로 하루를 마친다. 일을 통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그래서 묻고 싶다. 만약 직업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그리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까, 아니면 더 공허해질까?
그 사회에서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생존을 위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모든 생산을 담당하고, 분배 시스템은 완벽하게 작동한다. 완벽한 과정을 거쳐 설계되었기에 오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주어진 역할 없이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더 이상 사람들은 서로에게 직업을 묻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세요?” 라는 질문은 이제 무례한 말이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행복했다. 아침 출근길의 피로도, 야근의 스트레스도, 성과 평가의 압박도 사라졌다. 삶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이상한 공백이 생겼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내가 쓸모 있는 존재일까?’ 일이 사라진 자리에는 의미의 결핍이 남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에 기여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단기적으로는 삶에 목표나 의미가 없어도 일상을 사는 데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장기적인 삶을 봤을 때 나타난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삶의 의미를 잃은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버틸 수 없다.” 즉, 인간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살 이유를 찾기 위해서 일한다.
직업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그 이유를 잃어버린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 사회 속의 역할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서서히 갈피를 잃었다. 그들은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왜냐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무거운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직업이 없는 사회는 처음에는 평등하다. 의사와 과학자, 농부와 예술가의 구분이 없다. 모두가 동일한 존중을 받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른 형태의 계급이 생겨난다. 누가 더 나은 직업을 가졌는가가 아닌, 누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가로 나뉜다. 누군가는 철학을 연구하고, 누군가는 예술을 창조하며, 또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경제적 차이는 사라졌지만, 존재적 차이가 생긴다. 누군가는 자신이 쓸모 있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자신이 남는 존재라고 느낀다.
그렇다면 조금만 방향을 바꿔서 상상해 보자. 만약 직업이 존재하지만, 그 직업이 자신의 역량과 적성에 맞게 부여되는 시스템이라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타인에게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자연스럽게 배분되는 사회라면 어떨까?
그 사회에서 일은 고통이 아니라, 본성의 연장이 된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모두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받는다. 학문, 예체능 특정 분야에 치중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폭넓게 접한다. 모든 교육을 이수한 후에는 개개인의 특성과 역량을 평가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완벽히 잘 맞는 직업이 주어진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음악가로, 사람을 돌보는 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복지사로, 분석을 즐기는 사람은 과학자로 살아간다. 일은 노동이 아니라 표현의 언어가 된다. 이때 직업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직업의 의미가 바뀐다. 직업이란 자신의 기질이 사회로 번역된 형태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완벽한 적합은 또 다른 위험을 품고 있다. 만약 자기 적성에 완벽히 맞는 일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이유를 잃는다. 잘 맞는 일은 인간을 편안하게 하지만, 그 편안함이 창조의 긴장을 지워버린다.
직업의 부재는 곧 노력의 부재와 닮아 있다. 직업은 인간의 노력을 구조화한 형태이다. 노력이 사라지면 인간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가 없으면, 성취도 존재하지 않는다. 노력의 축적이 없는 사회는 마치 연습이 없는 음악회 연주와 같다. 소리는 올바르게 들리지만, 깊이는 없다.
직업이 없는 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꿈은 현실의 노동 위에서 만들어지는 상상이다. 노동이 사라지면, 꿈도 현실을 잃는다. 그들의 삶은 유유히 흐르지만, 그 흐름에는 목표도, 종착지도 없다.
나는 종종 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에는 물론 돈이 포함되어 있지만, 단지 돈 때문은 절대 아니다. 일은 자신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행위다. 직업은 그 흔적의 이름이다. 그것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결국 흔적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결론이 단순히 “직업은 필요하다.”로 끝나서는 안 된다. 리더나 경쟁처럼, 직업 역시 그 자체로 절대 선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직업의 존재가 아니라, 직업이 인간을 어떻게 의미화하느냐이다. 우리가 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에 기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더 이상적인 방향일지도 모른다.
직업이 없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역할을 새로 정의한다. 그들은 직업 대신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는다. 어떤 이는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어떤 이는 공동체를 돌보는 일을 자발적으로 맡는다. 그 일에는 보수도 지위도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이야말로 직업의 잔향이다. 리더가 사라져도 방향이 필요하듯이 직업이 사라져도 역할은 남는다. 그리고 역할은 여전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기술이 모든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세상에서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을 것이다. 그것은 계산이 아닌 공감, 속도가 아닌 느림, 정확성이 아닌 상상력이다. 직업의 부재는 인간의 무능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실험이다. 기계는 일할 수 있지만, 일의 의미를 느낄 수는 없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일을 누가 하느냐.”가 아닌, “일의 의미를 누가 이해하느냐.”이다.
직업이 없는 세상은 분명 자유롭다. 하지만 그 자유는 방향을 잃기 쉽다. 반대로, 직업이 있는 세상은 때로 억압적이다. 하지만 그 억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증명한다. 진짜 유토피아는 그 둘의 중간에 존재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일을 강요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나의 일을 찾을 수 있는 세상. 일이 삶을 지배하지 않지만, 삶을 비워두지도 않는 세상.
진짜 유토피아는 직업이 없어진 세상이 아니라, 일이 인간의 존재를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일 속에서 여전히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이다. 직업이 사라져도 일의 의미는 남는다. 그리고 그 의미가 남는 한, 인간은 여전히 일하는 존재로서 세상에 남을 것이다.
유토피아 실험실 - III. 사회, 제도의 결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