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히다

열렸던 이오가 닫히다

by garim

집으로 돌아온 하린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상처 속에 있는 인서가 걱정되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을 감춰 왔지만, 그 내면에서는 이미 오래된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 그런 인서를 떠올리자 하린의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린은 다시 일상의 리듬을 되찾으려 애쓰면서도, 인서에 대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인서를 찾아갔다. 한때는 얇은 유리처럼 느껴졌던 인서의 마음이, 조금씩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서의 눈빛은 예전보다 단단해졌지만, 아직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병원을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서는 남편과의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다. 오래된 사슬을 하나씩 끊어내듯, 인서는 고통의 흔적 속에서 천천히 자신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린은 무언가를 해주기보다, 그저 곁에서 인서가 다시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잡아주고 기다려 주었다. 예전, 자신이 겪었던 아픔에 서령이 묵묵히 곁을 지켜 주었던 것처럼. 하린도 그렇게 인서 곁에서 조용히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인서는 분명 스스로 단단해 지고 있었다.

이오로 바라본 인서의 궤도에서 불꽃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활활 타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궤도 속에서, 이제는 약해진 불빛 사이로 인서의 운명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이었다. 지금까지 꾹꾹 눌러 담으며 버텨왔던 날들이, 마침내 조용히 날개를 펴고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변화의 궤도 끝에서, 작게 타오르는 푸른 불빛이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새해를 맞이하자, 다시 따뜻한 봄기운이 바람을 타고 찾아왔다. 따스한 봄에 어울리는 몇 권의 신간이 도서관에 들어왔다. 새 책들을 정리하던 하린의 눈길이 ‘늦었지만 괜찮았어’라는 제목에서 멈췄다. 그녀는 책 표지 사진을 찍어 인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인서야, 늦었지만 네 인생이 괜찮길 바래.

사진과 함께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곧 답이 오겠지 싶었지만, 메시지의 알림이 조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서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하린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서령이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자기, 요즘 연애해? 누구 전화 기다리는 거야?

장난스럽게 던진 서령의 물음에 하린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누가 또 예쁜 얼굴에 주름을 만들었을까?”

하린은 자신의 걱정이 괜한 걱정이길 바라며, 인서를 향한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무슨 일이 또 생긴 건 아니겠죠?”

걱정스러운 하린의 표정을 바라보던 서령도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인서, 생각보다 강하잖아.”

서령의 말에 하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인서에게서 읽음 표시도, 짧은 답장도 오지 않았다. 하린은 결국 기다림을 멈추고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이고 이어졌지만, 인서는 끝내 받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전화벨이 울렸다. 하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인서였다.

“하린, 나… 병원이야.” 그 한마디에, 하린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 걱정하던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인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킨 눈물이 섞인, 떨리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애써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괜찮지 않은 기색이 가득했다. 하린의 마음속 불안이 더 깊어졌다. 인서의 전화가 끊기고 출근을 했지만, 걱정이 가시지 않아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잠시 후, 서령이 도서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인서가 마음에 걸렸는지 서령의 시선은 곧장 하린을 향했다. 걱정이 그득한 하린의 얼굴을 바라본 서령은, 굳이 묻지 않아도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린은 인서와 통화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병원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서령이 시선을 들어 하린을 바라봤다.

“이오는 어때? 지금 한번 열어보자.”
하린은 잠시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이오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인서가 새 삶을 향해 나아가는 희미한 희망의 빛이 있었다. 그 후로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인서의 모습을 보며, 정말로 괜찮아졌다고 믿었다. 그 후로는 이오를 다시 열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령의 말처럼, 어쩌면 지금이 다시 그 궤도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린은 이오를 꺼내 들었다. 눈을 감고 인서를 떠올리며 궤도 속으로 들어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전에 쉽게 열렸던 궤도의 접근이 어려웠다. 굳게 닫혀 있는 듯, 아무리 마음을 다해 열어보려 애써도 이상하게 열리지 않았다. 잠시 후, 이오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고, 하린은 초점을 잃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천천히 눈을 떴다. 하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서령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안과 혼란이 비쳐 있었다.

“열리지 않아요… 이상해요. 처음부터 닫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분명히 열렸던 궤도가 지금은 닫혀버렸어요” 하린의 말을 듣고 서령도 걱정이 되었다.
“인서에게… 생각보다 더 큰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아니면… 닫혀버린 궤도를 다시 열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하린의 목소리는 조심스럽지만 떨리고 있었다.

하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서령이, 무언가 떠오른 듯 손벽을 가볍게 마주쳤다.

“혹시… 그 책 안에 이런 상황이 나와 있지 않을까?”

서령이 말끝을 흐리며 하린을 바라보았다.

“운명의 돌멩이… 그 책 말씀인가요?”

하린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래, 바로 그 책. 닫혀버린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거기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지 않아?”

“맞아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하린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린은 망설일 틈도 없이 서둘러 책이 보관된 서고로 향했다. 오래된 지하 서고에서 잠들어 있던 그 책은, 도서관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책이었다. 하린은 책 을 찾아내 이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뒤, 그것을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직접 보관할 생각도 했지만, 결국 그 책은 본래 도서관에 있었던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공간인 이곳 도서관에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서고를 찾은 하린의 눈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자신을 향해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이오의 책이 들어왔다. 하린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책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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