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라는 시간
하린은 마음 속에 쌓여 있던 아픔을 쏟아낸 뒤, 스스로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다. 혼자 버티는 것이 강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아픔을 함께 나누기로 선택했다. 병원에 머무는 동안 심리 치료도 병행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하린은 감정을 숨기는 것이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하린은 오래도록 사랑은 내가 먼저 내어주는 것이라 믿어왔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 상대가 멀어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마음을 숨기고 누르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결국 하린 자신을 점점 소진 시켰고, 어느 순간 손을 놓아버리면 되돌릴 수 없게 무너지는 관계를 반복하게 했다. 무너지는 과정이 두려웠던 하린은 다시 손을 뻗어 타인의 감정을 받아내며 버티려 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기에, 남편이 떠나기 전 이혼을 이야기했을 때도 내가 손을 놓아야 저 사람이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제야 하린은 깨닫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유지한 관계였다는 것을.
하린은 한때 이런 생각을 품었다. 내가 다시 손을 잡아주었다면, 그 사람이 무너지지 않고 함께 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죄책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치료를 받으며 하린은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하린은 그저 타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려 했던 것뿐이었다. 정작 진심을 다해 관계를 지키려 한 사람은 하린 자신이었다. 떠나간 사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랑을 선택한 것이지, 하린의 사랑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린의 마음은 조금씩 단단해졌다. 자신을 탓하던 무게가 가볍게 풀려나기 시작했고, 하린은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짧은 입원이었지만, 하린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하린은 다시 회복으로 나아갈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자신이 충분히 회복되어야만 비로소 누군가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린은 천천히 이해해 나가고 있었다.
하린은 퇴원 수속을 마치고 한층 가벼워진 표정으로 병실로 돌아왔다.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잠시 앉았을 때, 문이 조용히 열리며 서령이 들어왔다.
“뭐야, 벌써 집에 갈 준비 다 했네?”
하린이 놀란 듯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선배님, 저 혼자 가도 되는데 뭐하러 오셨어요?”
서령은 대답 대신 하린 옆에 조용히 앉았다.
“하린. 이제부터는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와야지 당연히. 지금도, 앞으로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자.”
그 말에 하린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하게 번져오는 감각이었다. 그동안 ‘혼자 견디는 것’만이 강함이라고 믿어왔던 마음이, 조용히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서령은 하린이 아픔을 쏟아낸 뒤, 이제 하린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곁에서 조용히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린이 필요할 때 곁에 있는 단단한 존재가 되어주기로. 그렇게 곁을 지키는 과정 속에서 서령 또한 자신 역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함께 깨달았다.
“고마워요. 선배님, 아이들도 잘 돌봐 주셔서 제가 잘 쉴 수 있었어요.”
“고맙긴, 내가 더 고맙다고 했잖아. 아이들하고 함께 있으면서 나 더 젊어진 거 같지 않아?”
서령에게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힘든 과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장하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자신의 어린 마음을 천천히 어루만져 주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은 서령에게 조용한 행복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듯, 서령은 하린을 바라보며 오래 잊고 지냈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 미소는 막혀 있던 숨이 한 번에 풀리듯, 우렁찬 웃음으로 번졌다. 맑고 시원하게 울리는 그 웃음소리에 병실 공기가 한순간에 환해지는 듯했다. 하린은 서령의 웃음을 바라보며 알았다. 지금 이 순간, 둘 다 예전보다 한 걸음씩 더 살아 있는 마음으로 서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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