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인서와 만남

by garim

하린은 인서를 향해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인서는 그제야 하린을 발견하고,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의 만남 탓에 둘 사이에는 잠시 미묘한 어색함이 흘렀지만, 곧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말이 오가며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린은 인서를 향해 먼저 웃음을 보이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인서야, 어떻게 지냈어? 그동안 바빠서 연락을 못했어.”

인서는 자신 또한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잠시 어두웠던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웠다. 하린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답했다.

“아니야.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나도 시간이 좀 걸렸네.”

둘은 말을 이어가기보다 웃음으로 그동안의 마음을 전했다. 연락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미안함도 서로를 이해하는 태도로 조용히 받아들이며, 사이에 남아 있던 어색함은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 가라앉았다.

그 사이,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할아버지가 인서와 하린이 있는 자리로 터벅터벅 다가와 두 사람 앞에 조용히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인서를 향해 잔잔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자, 뜻밖의 등장에 인서는 순간 어색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서 오시오. 반갑구려.”

그러자 하린이 자연스럽게 나서서 자신과 알고 지내는 분이라며 인서를 소개했다. 인서는 살짝 굳었던 표정을 풀며 인사를 건넸고, 할아버지가 내려 준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인서는 처음 느껴보는 향기와 따스함에 마음이 조용히 내려앉는 듯했다. 긴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에도 온기가 스며들어 천천히 순환하듯 퍼져 나가며, 얼굴에는 홍조가 오르는 듯 은은한 붉은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인서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차에서 좋은 기운이 도는 것 같네요.”
할아버지는 그런 인서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다고 하니 다행이구려. 어서들 이야기 나누시게.”
말끝을 부드럽게 남긴 뒤, 할아버지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떻게 이 지역에 계신 분을 알게 된 거야?”

그 질문에 하린의 마음속에는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 혼란 속에 있을 것 같은 인서에게 그 진실이 또 다른 혼란이 되지는 않을지 조심스러웠다. 하린은 잠시 망설인 끝에, 할아버지와의 인연을 최대한 단순하게 전하기로 했다.

“어… 우리 집 앞에서 상점을 하셨는데, 나중에 여기로 이사 오셨더라고. 나도 여기 와서 알았어.”

인서는 그 말을 곱씹듯 잠시 생각하다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났다니, 정말 반가웠겠다.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네.”

“응… 그런가 봐.”

하린은 더 깊은 이야기가 이어질까 내심 마음을 졸이며, 그 선에서 조심스럽게 화제를 닫았다. 할아버지와의 관계도, 그 안에 담긴 사연도 지금은 이 정도로 남겨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인서는 하린의 아이들 안부를 물었다.

“아이들, 많이 컸겠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동안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도 한 번 제대로 묻지 못했네.”

“응, 많이 컸지. 이제는 엄마 걱정도 할 줄 알고…”

말을 잇는 순간, 하린의 마음이 살짝 멈췄다.
아이들 이야기를 꺼낸 것이 혹시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괜히 인서의 마음을 건드린 건 아닐지, 조심스러운 기척이 가슴 한쪽에 내려앉았다. 잠시 망설였지만, 하린은 결국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인서의 딸을 빼놓고는 이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린은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준비했다.

“아이는 어떻게… 지금은 같이 살고 있는 거야?”
하린의 질문에 인서는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응, 아직은. 그래도 매주 보고 있어. 지금은 할머니 댁에 있어.”
“할머니 댁에? 아이는 괜찮아?”
“응. 지금은 하영이도, 나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야.”

안정을 찾고 있다 는 인서의 말에 하린은 그제야 가슴에 걸려 있던 걱정을 조금 내려놓았다.

하린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가방에서 책을 꺼내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책 속에 납작하게 눌려 있던 네잎클로버를 꺼내 인서에게 건넸다.
인서는 하린이 내민 네잎클로버를 받아 들며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나, 네잎클로버네.”

“너 만나러 오는 길에 눈에 띄더라. 그냥… 너한테 보여 주고 싶어서 가져왔어.”

자신을 생각해 가져왔다는 하린의 말에, 인서는 어린 시절 네잎클로버를 찾아 헤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하린은 네잎클로버를 바라보는 인서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 기억해?”

하린의 물음에 인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 네잎클로버 찾겠다고 얼마나 당산나무 앞을 돌아다녔는데. 그때는 정말 하나 찾기가 그렇게 힘들었잖아…”

“인서야, 네게 다시 행운이 찾아오길 바랄게.”
“네가 이렇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이미 행운이 온 것 같아. 그리고 여기, 참 신기하게도 네잎클로버가 곳곳에 있더라. 마치 우리한테 행운을 건네는 것처럼.”

인서의 말에 하린은 인서를 바라보며 크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서로를 오래도록 생각해 온 시간만큼, 좋은 기운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웃음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퍼지며 두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채워 갔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잔 속의 차가 바닥에 가라앉을 즈음, 하린은 가슴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낼 마음을 먹었다. 오늘 인서를 만나며 조금은 생기를 되찾은 얼굴을 보았지만, 여전히 마른 체형과 손목에 남아 있는 상처가 하린의 눈에 자꾸 들어왔다. 더운 날씨에도 긴팔을 입은 채, 찻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소매가 말려 올라가면 애써 다시 끌어내리던 인서의 모습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입구에 들어섰을 때도 인서는 치마 안에 긴 레깅스를 받쳐 입고 있었지만, 맨발에 신은 샌들 위로 드러난 발목의 두꺼운 흉터까지는 가릴 수 없었다. 하린의 시선은 자꾸만 그곳에 머물렀다. 그 흉터에는 인서가 견뎌온 고통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듯했고, 하린은 인서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마음속에서 밀려오는 친구의 아픔을 애써 눌러 담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억누를수록, 인서의 상처는 마치 감정이 옮겨 붙듯 고스란히 하린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린은 이 만남을 그저 웃음으로만 마무리하고 헤어질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인서야, 나… 사실 많이 아팠어.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이 갑자기 무너지더라.”

하린의 말에 인서는 가슴이 털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나 너무 내 마음만 보고 있었던 것 같아.”

“아니야. 내가 아파 보니까 알 것 같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사람마다 아픔을 이겨내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닌데, 다들 저마다 버티는 방법을 선택하는 거지. 넌 아픔이 밖으로 드러나는 쪽이었고, 난 숨기는 쪽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내가 겪어 보니, 숨긴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더라….”

하린의 이야기를 듣던 인서는 잠시 말을 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인서는 하린을 바라보다가,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고마웠어. 네가, 나한테는 나의 아픔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해줬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린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미처 막지 못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고, 하린은 당황한 듯 손등으로 급히 눈가를 훔쳤다. 인서는 아무 말 없이 화장지를 한 장 건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오래 쌓여 있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너도 힘든 상황이었잖아.

그런데도 나를 찾아와 주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애써주는 모습이…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줬어.”

잠시 숨을 고른 인서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와줘서, 나… 정말 기뻐.”

마지막 말이 끝날 즈음, 인서의 눈가 역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웃음으로 시작해 눈물로 잠겼지만, 그 눈물은 슬픔보다는 오래 눌러 두었던 마음이 풀려나는 흔적에 가까웠다. 서로를 위해 남겨 두었던 감정을 하나씩 꺼내놓고 나니, 어린 시절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나누던 네 잎 클로버처럼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힘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마음을 꺼낼 수 있었고, 서로를 생각했기에 다시 한 번 행운을 빌어줄 수 있었다. 그날의 대화는,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하지만 단단한 온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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