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인서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하린은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비로소 덜어낸 기분이었다. 달빛 카페에서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 또한 지친 그녀의 마음에 따뜻한 위로와 안식을 안겨 주었다.
하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달빛에 비친 이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바닥 위에서 빛나는 이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선명한 색으로 숨 쉬듯 빛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궤도를 바라보는 순간, 하린은 전에 보지 못했던 자리를 발견했다. 불을 상징하는 火의 영역 그곳에서 이오는 마치 보석처럼 또렷한 궤도를 그리며 빛나고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뜨겁고, 고요하지만 분명한 에너지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 빛을 마주한 순간, 하린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 손 위에서 빛나고 있는 이 궤도가,
자신이 앞으로 걸어가게 될 자신의 운명이 그려진 궤도라는 것을.
자신의 운명의 궤도를 마주한 하린은, 그 빛이 생각보다 훨씬 밝게 타오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두려움보다 온기가 먼저 닿는 궤도였다. 자신이 걸어가게 될 길이 결코 어둡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시간 또한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은 가볍게, 그러나 분명한 의지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그 빛은 앞으로 나아가도 괜찮다고, 지금의 자신을 믿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하린은 도서관을 찾은 서령에게 인서를 만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밤사이 겪은 일들이 아직도 꿈결처럼 느껴져,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남김없이 꺼내 놓았다. 서령은 하린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으며, 이전과는 달리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말끝마다 묻어나는 숨의 여유와, 스스로도 미처 자각하지 못한 안도감이 하린의 얼굴에 고요히 번지고 있었다. 서령은 그 변화를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하린이 건네는 이야기 하나하나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그 밤이 하린에게 남긴 의미를 이미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그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단 말이지? 아, 믿기지가 않네. 나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정말 아쉽다, 아쉬워.” 서령은 제 일처럼 흥분하며 하린의 이야기에도 열렬히 맞장구를 쳤다
아침부터 유난히 떠들썩한 도서관 안에서는, 마치 책 속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들이 하나둘 깨어나 밖으로 흘러나온 것처럼, 하린과 서령의 대화는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시간 같았다.
하린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을 때마다, 그 전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서령뿐이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함께 걱정해 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는 그 태도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소통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말보다 먼저 마음이 오가는 관계라는 것이, 그 조용한 공간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어디선가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스쳐 지나가는 소음처럼 느껴졌지만, 이내 그 소리는 점점 다급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바뀌어 갔다.
하린과 서령은 동시에 말을 멈췄다. 서로의 얼굴을 잠시 마주한 뒤, 두 사람은 더 묻지 않아도 된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 문밖으로 뛰쳐나갔다.도서관 문밖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사이, 한 노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서 있는 틈을 비집고, 하린은 곧바로 쓰러진 노인 곁으로 달려갔다.
하린은 무릎을 꿇고 노인의 상태를 확인했다.
“할머니, 할머니. 제 말 들리세요?”
양쪽 어깨를 잡고 강하게 흔들며 반응을 확인했지만, 노인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동시에 호흡과 맥박을 빠르게 확인했으나 정상적인 호흡은 관찰되지 않았다.
그사이 서령은 즉시 119에 신고하며 상황을 설명했고, 다시 노인 곁으로 돌아와 하린과 함께 상태를 살폈다.
하린은 의식과 호흡이 없음을 확인한 뒤, 노인을 평평한 바닥에 바로 눕혔다. 곧바로 흉부 중앙에 손을 위치시키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응급처치 교육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 상황에서 시행하는 흉부 압박은 생각보다 훨씬 힘에 부쳤다. 일정한 깊이와 속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일은 여성의 힘으로 버거웠다.
하린이 손을 교대해야 할 순간, 주변을 둘러보던 중 한 건장한 남성이 빠르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말없이 손 위치를 교체하더니 곧바로 정확한 자세로 흉부 압박을 이어갔다.
잠시 후 남성은 고개를 들어 하린을 향해 외쳤다.
“하린 씨, 자동심장충격기 가져오세요!”
하린은 망설이지 않고 도서관 내부에 비치된 자동심장충격기(AED)를 가져와 남성에게 건넸다. 현장은 긴박했지만,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분명한 목적과 절차가 있었다.
남성은 자동심장충격기의 음성 안내에 따라, 패드를 환자의 오른쪽 쇄골 아래와 왼쪽 갈비뼈 아래 옆구리 부위에 정확히 부착했다. 이후 지시에 맞춰 흉부 압박을 이어간 그의 침착하고 숙련된 응급처치 덕분에,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노인은 점차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하린 역시 노인의 얼굴을 확인한 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린은 곁에 있던 남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시온님… 고생하셨어요.”
그녀는 감사의 뜻을 담아 시온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령 역시 두 사람을 바라보며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짧았지만 숨 막히던 순간을 함께 견뎌냈다는 사실에, 서령의 얼굴에는 말없이도 흐뭇한 기색이 떠올랐다.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 역시 세 사람의 침착한 응급처치를 지켜보며, 의식을 되찾은 노인과 하린, 서령, 시온을 향해 조용한 박수를 보냈다.
그 박수는 요란하지 않았지만, 함께 긴장을 견뎌낸 안도와 감사가 고스란히 담긴 순간이었다. 노인은 구급대원과 함께 응급차를 타고 안전하게 병원으로 향했고 긴박했던 현장은 그렇게 서서히 일상의 숨결을 되찾았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온 서령과 시온은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잠시 숨을 돌렸다. 긴박했던 공기가 가라앉자, 서령은 시온을 바라보았다. 반가움보다는 어딘가 의심이 섞인 눈빛이었다.
“시온, 그런데 말이야.”
서령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이 시간에 서울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까지 어떻게 나타난 거야?”
시온은 잠시 말을 고르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멋쩍은 표정으로 서령과 하린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출장이요.”
잠깐의 침묵 뒤, 그는 말을 덧붙였다.
“아마… 이제는 여기로 내려와서 일하게 될 것 같아요.”
그 말과 함께 시온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하린에게 머물렀다. 그 짧은 눈 맞춤 속에는, 아직 말로 하지 않은 여러 의미가 조용히 섞여 있었다. 하린은 시온의 시선을 은근히 피하듯 고개를 돌렸지만,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마음 한켠이 가볍게 흔들렸다. 설명하기 어려운 설렘과 긴장감이 동시에 스며들며, 공기 속에 미묘한 떨림이 감돌았다.
그 기류를 느낀 듯, 서령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시온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게 된다는 소식이 반가운 일이라는 듯, 축하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서로 잘됐네?”
서령은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자주 보겠어.”
서령 특유의 밝은 웃음소리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웃음에 이끌리듯, 하린과 시온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시선 속에는 같은 마음을 알아본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깊고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서령은 문득 떠오른 듯 시온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시온, 그런데 말이야. 아까 보니까 응급처치가 꽤 능숙하던데?”
서령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보통은 실전이 처음이면 그렇게 쉽지 않잖아. 뭔가… 전문가 손길 같았어. 혹시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던 거야?”
서령의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뿐 아니라, 아까의 긴박한 순간을 함께 겪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서령의 질문에 하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하린 역시 궁금함보다 먼저, 고마움이 앞서 있었다. 하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시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는 시온님이 아니었으면… 제 힘만으로는 할머니를 살려내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너무 절박한 순간이었잖아요.”
그녀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그런데 정말 딱 그 시간에 시온 님이 나타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말끝에는 여전히 긴장이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전해지는 것은 진심 어린 감사였다. 시온은 두 사람을 향해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생각을 정리하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크게 꾸미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학교 때 대한적십자사 RCY에서 응급처치랑 심폐소생술 활동을 했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사람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봉사활동도 하고 그 이후로도 사회에 나와 봉사 기관에 교육을 나가기도 했고요.”
잠시 말을 멈춘 시온은,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뭐… 지나가다 몇 분 도와드린 적도 있고요. 그 정도예요.”
그는 마지막 말을 하며 ‘별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곁에 서는 일을 선택해 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단단함이 조용히 배어 있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 움츠러들어 있던 시온의 모습과는 달리, 그의 안에는 전혀 다른 능력이 조용히 숨겨져 있었다. 하린은 시온이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는 말을 들으며, 마치 그동안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얼굴을 만난 듯한 낯섦을 느꼈다.
그러나 그 낯섦은 곧 미묘한 설렘으로 바뀌었다. 하린이 그러했듯, 시온 역시 말없이 타인을 돕는 일을 선택해 왔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마음에 닿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온 안에서 자신과 닮은 결을 발견했고, 그 발견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설렘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시온은 하린 자신보다도 먼저, 타인을 향한 마음이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하린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돕는다는 것은, 내면 어딘가에 스스로 단단히 서 있는 자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타인의 무게를 함께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그렇기에 하린은 생각했다. 지금의 시온은 단순히 자립한 상태를 넘어, 이미 그 이상에 도달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먼저 살필 수 있는 자리 그곳에 시온은 조용히 서 있었다.
시온과 하린이 나란히 걷는 길 위로, 어제보다 한결 환한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는 온기가 가득했고, 그 온기는 오래 남아 있던 차가운 기운을 천천히 녹여내고 있었다. 이윽고 시온은 걸음을 멈추고 하린 앞에 마주 섰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하린 씨, 그동안 혼자 걸어오던 그 길 이제는 제가 함께할게요. 다음 주면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니까, 제가 그 일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하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에는 망설임보다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한마디에, 하린은 오래도록 짊어지고 있던 바위 덩어리를 내려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버티기 위해 힘을 주고 있던 몸과 마음이 동시에 풀려나며, 깊은 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린의 눈가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위로와 안도, 그리고 함께 걸어도 괜찮다는 믿음이 스며든 따뜻한 눈물이었다.
그날의 빛은,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일주일 후, 시온은 하린이 있는 N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왔다. 그는 도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와 당분간 함께 지내게 될 것이라고 담담히 전했다. 서로의 마음이 가까워진 만큼, 물리적인 거리도 자연스레 좁혀졌다. 스치듯 이어지던 만남은 점점 잦아졌고, 함께 보내는 시간도 서서히 늘어갔다. 약속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하루들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으로 한 어린 손님이 찾아와 하린을 찾았다.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꾸미지 않은 차림에, 몸에 맞지 않는 듯한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하자, 아이에게는 어른의 손길이 오래 머물지 않았다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시간이 더 길었을 것 같은그런 외모였다. 하린은 그 소년을 바라보며, 이유 없이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니?”
하린이 부드럽게 묻자,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두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봉지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봉지를 쥔 손끝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소년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수줍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 우리 할머니가 가져다 드리래요.”
봉지 안에는 막 쪄낸 듯 김이 은은히 오르는 옥수수가 담겨 있었다. 따끈하고 투박한 그 선물에는,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소년은 지난번 도서관 앞에서 쓰러졌던 할머니의 손자인 듯 보였다. 하린은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마음에, 서둘러 이것저것을 찾아 소년의 손에 쥐여주려 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뒤돌아서 도망치듯 달려가 버렸다. 붙잡을 새도 없을 만큼 급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뿌리치는 소년의 손끝이 하린의 손에 스쳤다. 어린아이의 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차갑고, 거칠었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그 온도는 하린의 마음 깊숙이 남았다. 뒤돌아서는 소년의 눈빛에는, 마치 오래 눌러 담아 온 어둠이 서서히 차오르는 듯한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하린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선 채, 달아나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손에 남은 감촉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의 옥수수보다도 더 또렷하게 소년의 차가운 손이 하린의 기억 속에 남았다.
같은 또래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하린으로서는, 그 소년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책을 정리하는 순간에도—소년의 차갑던 손과 어둠이 어린 눈빛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하린은 결국 서령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듣던 서령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 소년을 알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령 역시 전해 들은 이야기였지만, 할머니와 손자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것, 할머니에게 지병이 있어 손자를 제대로 돌보기 어려운 상태라는 것, 그래서 수급 대상자로 지정 되었지만 할머니의 병원비며, 아들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느라 생활이 여전히 빠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서령은 말을 마친 뒤, 하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린이 어디까지 마음을 쓰게 될지 이미 짐작한 듯, 말없이 하린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하린이 감당해야 할 몫 이상으로 마음이 깊이 들어갈 것을 서령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린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소년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못 본 척 지나가기에는, 이미 그 아이의 그림자가 마음 깊숙이 들어와 버린 뒤였다. 하린은 알면서도, 외면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린은 소년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애써 숨긴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지만, 손과 시선만은 분리된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시온이 조용히 다가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하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시온을 발견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 드리워져 있던 얼굴의 그늘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이내 환한 웃음이 번졌다.
“이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 하린이 묻자, 시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지나가는 길이어서요. 같이 밥이나 먹자고 왔어요.”
그때 어디선가 서령이 나타나 두 사람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시온을 발견하자마자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니, 그 회사는 그렇게 자주 외출해도 되는 거야?” 서령은 장난스레 웃으며 덧붙였다.
“허구한 날 나오다간 시온, 짤리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시온은 마치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서령은 상황을 한 번 더 살핀 뒤,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래, 밥은 먹어야지.” 그러곤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갈게. 둘이 맛있는 거 먹고… 힘내자.”
서령은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나며,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자리를 피해 주었다.
시온과 하린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부터 지나온 시간들, 달빛 잡화점과 이오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던 순간까지서로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며,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애써 눌러 두었던 하린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하린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시온은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다 시온은 문득 하린의 눈빛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린 씨, 혹시… 아직 말하지 못한 부분이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나요?”
그 질문에 하린은 순간 들킨 것처럼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라고 말은 했지만,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하린이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듯, 시온 역시 사람을 많이 상대해 온 직업인이었다. 말보다 먼저 드러나는 눈빛과 표정을 읽는 일은 그에게 낯설지 않았다. 시온은 부드럽지만 단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사람을 많이 보다 보니요, 이 사람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는… 표정만 봐도 느껴질 때가 있어요.”
잠시 말을 고른 그는, 하린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지금 하린 씨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은 다그침이 아니라, 하린이 스스로 꺼낼 수 있기를 기다리는 조용한 배려에 가까웠다.
하린은 잠시 말을 멈춘 채 시온을 바라보다가, 생각을 정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얼마 전에 지난번에 쓰러졌던 할머니의 손자가 찾아왔어요.”
하린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계속 마음이 쓰이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소년이 찾아왔던 순간과, 할머니의 상황, 그리고 그때 느꼈던 아이의 어둠까지 차분히 하나씩 꺼내놓았다. 말하는 동안에도 하린의 표정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고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온은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하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이미 마음을 정해 두었던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린 씨, 지난번에도 말했잖아요.”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이제 이런 일은 같이 하자고요.”
시온은 잠시 하린을 바라본 뒤,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하린 씨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이면, 이제 제가 있어요. 같이 해요.”
그 말과 함께, 시온은 소년을 함께 찾아가 보자고 자연스럽게 제안했다.
그 제안에는 설득도, 다짐도 필요 없었다. 이미 함께 걷기로 한 사람의 말처럼 그저 당연한 선택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다음 날, 하린은 서령에게 시온과 함께 그 소년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결정 했음을 전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서령은 조심스레 하린을 말렸다. 마음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온이 함께 간다는 말에 서령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린 혼자라면 힘에 부칠지 몰라도, 시온이 곁에 있다면 소년의 상황도, 하린을 향한 자신의 걱정도 한결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문득, 자신까지 함께한다면 더 단단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치 마음을 굳게 정한 사람처럼 하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린, 나도 같이 가자.”
서령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보다, 나도 함께하고 싶어.”
서령이 먼저 내민 그 말에, 하린의 마음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든든함이 스며들었다.서령과 시온이 함께해 준다면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길을 건넌 것 같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이른 저녁 소년의 집으로 향했다. 그 길에는 달빛과 별빛 사이로, 이오의 빛까지 겹겹이 스며들어 함께 길을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