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작 되었다.
10여 년 전 내가 내린 선택은 늘 고된 업무와 함께했고, 언제쯤 이 일을 그만둘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일을 해 올 수 있었던 이유를 떠올려 보면, 결국 나를 붙잡아 준 건 아이들의 웃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결혼 후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보육교사는 한 번도 진지하게 떠올려 본 적 없는 직업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의 나는, 어린이집 교사란 그저 어린아이들의 밥을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단순한 이미지 속에서 보육교사는, 내 삶과는 꽤 거리가 먼 직업이었다. 하지만 남편을 따라 귀농을 선택한 나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마흔에서 여든을 훌쩍 넘는 어르신들 사이에서 세대를 넘나드는 소통을 하다 보면, 이 길을 스스로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우물 안에 갇힌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시부모님께서 짓던 딸기 농사를 넘겨받아 장화를 신고 진흙밭을 오르내리는 일은 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을 열 때마다 집 안으로 들이치는 황토 먼지, 여기저기 떨어진 흙덩이들, 그 사이를 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후회는 하루하루 쌓여 갔다.
매일 밤, 바지에 다닥다닥 붙은 흙을 손으로 비벼가며 씻어냈다. 구정물이 맑아질 때까지 몇 번이고 헹궈 보았지만 물은 쉽게 투명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쉽게 가라앉지 않던 내 마음속 구정물 같았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가면 보이는 것은 여전히 논과 밭뿐이었다. 문화생활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그나마 ‘외출’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작은 읍내였다. 차를 기다리고,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가는 데만도 거의 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도착한 읍내조차 광역시의 한 동만도 못한 곳이었다. 지긋지긋한 오지 생활 속에서 나는 점점 무너져 갔다. 우울증이었는지,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 짜증이 늘어갔다. 귀농이라는 말은 그럴듯했지만, 나에게는 오지에 갇혀 농사만 지으며 살라는 벌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맞지 않은 농사일을 버티며 일하는 동안, 나는 점점 내 감정을 돌볼 여유를 잃어 갔다. 그렇게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 끝에, 생각지도 못한 어린이집 교사라는 길을 선택했다.
어린이집 교사란 돌봄과 교육의 경계에서 아이의 삶을 안전하게 받쳐 주며, 천천히 자라는 시간을 묵묵히 동행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함께한 그 시간 동안 자란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는 그 순간만큼은, 나 역시 가장 많이 웃을 수 있었고, 그 웃음 속에서 나 또한 조금씩 자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선택한 나의 직업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아이들과 함께하며 나를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게 했다. 아이들의 웃음과 행동은 배움이었고, 위로였으며, 치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