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에 쓰기 시작한 몰스킨 노트가 한 권 있다.
뭔가를 끄적이고 싶었나 보다.
2012년 1월에 시작해서 며칠 이어지다가 한참을 끊어지다 한다. 그러다가 2016년 어느 날에 끝나 있었다.
그즈음에 쓰는 것도 의미 없다 싶었을 것이고, 몰스킨 노트가 뒷면에 잉크가 배어나는 것도 맘에 안 들었지 싶다.
그렇게 방치된 채로 내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린 채, 인도까지 따라가서 바닷바람의 습기와 퀴퀴함을 묻혀온 채 책상 서랍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이 노트를 펼쳐 읽었는데, 밑줄을 그으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이 어찌 되었는지를 주석을 달다 보니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10여 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 보다 성숙했고, 지금 잊어버린 것들을 그때는 알고 있었다는 점,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선의 한 지점처럼 완전히 그걸 모르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다시 이 노트에 흥미가 생겼다. 반쯤 비어있는 페이지들을 채워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기도 쓰고, 단상도 남겨놓고, <The daily stoic>을 필사하고 짧은 글을 쓰는 식으로도 채워나갔다.
오늘은 그냥 읽고 있는 성경책에서 남겨두고 싶은 구절을 적어뒀다. 영어 성경책에서도 같은 구절을 찾아 옆 페이지에 적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마지막 쪽에 가까웠다.
노트 한 권을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음에 감사함이 차올랐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미한 일을 벌여놓기가 일쑤인데 말이다.
지난 12년을 살아온 조각들을 남겨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올 수 있었음에,
이어지는 걸음들은 이전 걸음들로부터 어떻게든 힘을 받아가며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부모님으로부터 내세울 것도 없고, 감출 것도 없는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을 10년 전에도, 오늘도 배우고 있다는 점에... 감사한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새로운 단어를 추가할 수 있게 됨에 감사한다.
그 단어는 '타인'과 '목적'이다.
그동안 내가 마음으로 쓴 글들에 별로 등장하지 않았던 단어들이다.
삶은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을 하고, 모든 중심은 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삶의 '목적'을 향해 있고, 그 목적은 '타인'을 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의 정말 마지막은 아들의 흔적이다.
두 살짜리 아이가 두 가지 색으로 선을 그어놓은 것을 기뻐하며 날짜를 써뒀었다.
이제 열넷이 된 아이는 그 옆에 로봇 그림을 그려준다.
이 모든 것이 내가 구했던 것들이고, 그로부터 얻게 된 것들임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