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어느 날 경기도 화성의 남양성모성지에 갔다. 그날은 먼저 세상을 떠난 두 동생의 생일이어서 어디가 되었든 성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8년 전에 먼저 간 동생과 몇 달 전에 불현듯 가버린 동생을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거대한 막막함의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곤 했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대성당, 미술작품, 짓고 있는 건축물들, 평화롭게 가꾸어진 조경들. 그러나 거기에는 눈에 보이는 장엄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곳을 30년 넘게 조성해 오고 계신 신부님이 계신 것이다. 보통의 야산에 조성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그곳이 순전히 그 신부님의 추진력과 희생으로 수많은 신자들과 건축가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뤄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웠다. 돈이 있다고 될 일이 아니라 마음이 모여야 이뤄질 일이고, 보통의 마음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깊은 마음들이 움직여야 의미가 생기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서 행동을 만들고 의미를 생겨나게 해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 지향하는 바가 이뤄지리라는 나약하면서도 강렬한 믿음들이 생겨나는 곳이 된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과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오른쪽을 바라보니 제대에 펼쳐져 있는 줄리아노 반지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린 그림에서는 열 두 제자 모두 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중요한 일을 믿고 맡겨야 할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낡고, 늙고, 허름하면서도 중앙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자신들끼리 뭔가 얘기하는 모습들. 그걸 보면서 우리 사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할 때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게 마련이다. 그게 기본이라고 생각하면 누군가 한 명이라도 뜻이 맞을 때 얼마나 반갑고 고마울 일인가! 게다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수천 년을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쉴 중요한 대상을 두고도 저렇게들 제각각인데, 하물며 내가 살면서 하려 하는 일들에는 외로움이 많다 한들 누구한테 하소연 한들 인간 사이에서 위로받지 못함은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는 파티마의 성모상 앞에 모여 있었는데, 그 눈빛이 분명히 휑하게 생겼는데도 나를 뚫어지게 바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조각 기법이려니 하다가도, 그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나를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신부님은 짧은 기도문을 알려주시며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이 기도를 올려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라고 하셨다. 마침 함께 간 중학생 아들이 긴 미사와 강론으로 지쳐있는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불편해지고 있었는데, 그 기도를 작은 소리로 읽어봤다. 어쩐지 그렇게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에서는 짜증이 나지 않았다. 덕분에 아들도 스스로 지친 마음에서 회복하고 무더운 공원을 가로질러 성지 안에 있는 가건물에서 국수 한 그릇씩을 맛있게 비우고 충만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기도 쉽지 않은 세상인지도 모른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더 쉬워지기도 하고. 하지만, 보이는 것 너머에 분명히 어떤 것이 있음은 알 수 있다. 그것은 일상의 틈새를 비집고 잠시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 끝자락을 잡고 '이게 뭘까?'라는 질문을 던져가면 어느 순간 새로운 깨달음이 떠오르고 그제야 비로소 일상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곤 한다.
어쩌면 일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열게 하는 경험들은 두 동생들이 내게 남겨준 삶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