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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Jul 24. 2024

거부할 수 없다.

출근길 걷기

2년 전 무릎이 아파서 계단을 내려가기도 힘들어졌을 때, 의사 선생님이 알려주신 몇 가지 방법 중 하나가 걷기였다. 운동을 가르쳐주시던 물리치료사님은 오히려 걸어서 아파졌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할 수 있는 게 그나마 그것밖에 없었다. 


나이에 따른 몸의 기능 변화를 더 이상 무시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걸 하자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일단 걸었다. 


3.8km. 집 현관에서 직장 현관까지의 거리다. 숨이 차는 듯도 하고, 땀도 나서 얼굴은 벌게진 채로 출근하는 게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근무복으로 갈아입는 부서였고, 항상 온도가 18도 정도로 맞춰지는 방에서의 업무도 있었기에 금방 쿨다운 하고 업무모드로 들어갈 수 있었다. 


40분쯤 그렇게 걷고 나면 온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졸린다기보다는 뭔가 전신적으로 워밍업을 한 느낌이 개운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우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일은 과거가 되어가고, 쭈그리고 앉아서 선반 아래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무릎은 좋아졌다. 


그렇다면, 계속 걷는 것이 내게 좋은 일이겠다 싶었다.


하나의 개별 사건들은 그대로 존재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를 가져오는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 


지난겨울 점점  '걸어서' 출퇴근하기가 내 삶에서 중요한 기둥이 되어감을 느끼며, 좋아하게 된 단어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였다. 


비에 조금이라도 젖는 게 싫어서 차를 타곤 했던 경험을 바꿔보고 싶어서 우산을 쓰고 길을 걸었고, 미끄러운 길은 질색이건만 눈이 내린 길도, 얼어붙은 길도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 


비 오는 날은 나름의 소리와 냄새가 있었고, 눈 내린 길에는 그 추위를 살아가는 새들과 나무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땀 흐르는 여름의 출근길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생전 타지 못하던 자전거를 아들을 선생님으로 두고 배우기도 했다. 물론, 3.8km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길은 연습이 더 필요하긴 하다.


그렇게 나는 하기 싫은 일도 해보고, 못 할 것 같던 일도 어떻게든 해 보는 경험을 더해갔다. 


요즘같이 더운 날에도 나는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차를 가지고 출근할까 생각도 하지만 결국은 걷게 된다. 


출근 준비를 하며 창 밖에서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 바람을 느끼며 걸으며,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 회사로 가는 길에는 울창한 벚꽃나무길이 있다. 


1km쯤 이어지는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알람브라 궁전으로 걸어 올라가던 산속의 길이 떠오른다. 정거장을 잘 못 알고 미리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가던 15년 전 6월의 어느 날 아침이다. 새벽 비행기로 그라나다에 도착했던 그날. 내가 이슬람 건축물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작점이 바로 그날이다. 어쩐지 슬프고 아름다웠던 그곳을 떠올리며, 그동안 내가 읽어오고 머릿속에 엮어낸 것들을 새겨보며 걷는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한 걸음을 뗄 떼마다 움직이고, 모양이 바뀐다. 


문득, 걸음을 내딛는 것에 인생 전부가 담겨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온 마음을 집중해서 어깨를 펴고, 등판 가운데에 힘을 집중하고 아랫배를 넣고 엉덩이를 힘주는 것. 그러면서도 다리 근육을 느끼며 발바닥이 땅과 골고루 닿도록 신경 쓰는 것. 숨을 들이쉬며 횡격막이 내려가서 그 근처 신경들을 자극하는 것을 느끼는 것. 숨을 내쉬며 다음 숨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그 순간의 삶의 전부이다. 


기대도 후회도 머무를 곳이 없는 그 순간. 걷는 동안 그런 순간을 5,000번이나 경험할 있는 기회가 뿌려지는 것이다. 수많은 기회들과 가능성. 풍부함을 알아차릴 때 삶이 경이롭고 충만함이 느껴진다. 삶에 대한 감사가 내 안에 가득해진다.  


이래서 내가 걷기를 그만둘 수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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