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경계에 대하여
저자: 성해나
출판: 창비
발행: 2025.03.28
작가 성해나가 두 번째 소설집 『혼모노』를 선보인다. 첫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서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부드럽고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첫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에서 오해와 결별로 얼룩진 과거에 애틋한 인사를 건네고자 했던 그가 『혼모노』에 이르러 더욱 예리해진 문제의식과 흡인력 넘치는 서사를 통해 지역, 정치, 세대 등 우리를 가르는 다양한 경계를 들여다보며 세태의 풍경을 선명하게 묘파해 낸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는 지난해 끊임없이 호명되며 문단을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표제작 「혼모노」를 비롯해 작가에게 2년 연속 젊은 작가상을 선사해 준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이 계절의 소설과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된 「스무드」 등이 수록되어 더욱 눈길을 끈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박정민 배우의 추천사에 이끌려 보게 된 <혼모노>. 사실 한 달 전쯤 완독한 책인데 어쩌다 보니 조금 늦은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다. <혼모노>는 총 7개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 소설집으로, 작품 하나하나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비교적 일상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구성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을 만한 가치들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무엇보다 특정 가치 간의 모호한 경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 결말이 주는 힘도 대단했다. 수록된 모든 작품들이 어느 정도 열린 결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결말을 읽고 나면 꼭 앞의 내용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이 덕분에 책에 담긴 메시지를 곱씹으며 여운을 길게 느낄 수도 있었다. 모든 수록작이 인상 깊었지만, 그중에서도 세 작품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먼저 표제이기도 한 「혼모노」는 무당에 대한 이야기이다. 30년 간 박수무당으로 살아온 문수는 얼마 전부터 자신이 모시던 장수할멈이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걸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앞집에 젊은 신애기가 신당을 차리고, 문수는 자신을 떠난 장수할멈이 그 신애기에게로 갔음을 발견한다. 무당의 능력을 잃은 문수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나, 결국 굿판에서 망신까지 당하고 만다. 심지어 문수와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왔던 황보도 더 이상 그를 믿지 못하고 신애기에게 굿을 맡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문수는 황보와 신애기의 굿판에 찾아가 그 옆에서 자신도 함께 굿을 한다.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굿을 하던 중 비로소 스스로가 가짜 무당이 되었음을 받아들인다.
제목의 '혼모노'라는 말도 '진짜'라는 의미를 가진 일본어라고 하는데 이 작품을 보며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신이 들어오는 무당을 진짜, 더 이상 신이 오지 않는 무당을 가짜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아마 문수는 이렇게 생각해서 자신이 가짜가 되었음을 부정했던 거겠지. 그런데 신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두 경우 다 가짜일 수 있지 않을까? 가짜는 아무리 노력해도 진짜가 될 수 없는 걸까? 신이 들어온 상태에서 무당은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건데 이런 경우는 진짜와 가짜가 공존하고 있는 걸까? 이처럼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문제들이 여럿 떠올랐다.
다음으로 「스무드」는 한국계 미국인 3세인 듀이가 한국에 방문하며 겪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듀이는 세계적인 미술가 제프의 전시 준비를 위해 한국에 온다.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한국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편견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 듀이는 한국에서 휴식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급스러운 아파트 숙소를 떠나 종로로 향한다. 그러다 길을 잃고 헤매는데 이때 태극기 부대를 만나게 된다. 태극기 부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고, 사람들과 말도 안 통하는 듀이에게 이 상황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자신을 잘 챙겨주는 이들에게서 어느 순간 따뜻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의 경계를 찾아볼 수 있었다. 또 이 작품에서 역시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태극기 부대 사람들이 듀이에게 친절했던 건 진짜지만, 듀이가 본 태극기 부대의 모습은 가짜였다. 듀이의 눈에는 축제처럼 보였던 것과 달리 태극기 부대는 시위와 극심한 정치적 이념 갈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목 '스무드'는 제프가 전시하러 온 작품을 뜻하는데 매끈하게 세공된 검은색의 거대한 구다. 이를 보고 듀이는 제프의 작품에 어떤 의도나 동기, 비밀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데 누군가는 구 안쪽에 뭔가 숨겨진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스무드를 듀이의 시각에서 본 태극기 부대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없이 서로 잘 어울리며 노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갈등의 현장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브로 하여 건물의 설계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건축가이자 교수인 여재화는 경동 수련원의 설계를 의뢰받는다. 수련원으로 위장된 이 건물은 사실 고문실로 사용될 공간이다. 일정이 바빴던 여재화는 자신의 제자인 구보승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명예와 돈을 우선시하던 자신과 달리 구보승은 별다른 야망 없이 그저 실용적인 설계를 하는, 그러면서도 꼼꼼하고 철저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구보승은 평소처럼 인간을 위한 공간을 목표로 설계를 해 나간다. 고문실에서 고문당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고문실의 목적을 떠올리며 설계를 해 나간다는 것이다. 계단을 나선형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공간 감각을 잃도록 하고, 천장을 높여 비명 소리가 잘 울리게 만듦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시킨다. 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제공한다. 이런 구보승을 보며 여재화는 건축 위에 사람이 있다고 믿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그리고 여재화 본인이 아닌 구보승을 설계자로 기록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게 가장 먼저 떠올랐다. 구보승은 평소 공간의 목적, 그곳에서 지낼 사람을 생각하며 설계를 했다. 그게 거주 목적의 평범한 건물이라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는 인간을 위한 설계가 된다. 하지만 고문 목적의 건물이라면 그 뜻이 달라진다. 고문당할 사람들을 고려하여 설계한 만큼 악랄한 결과물이 탄생한다.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건물의 목적에 맞게 훌륭한 설계를 이뤄낸 것인데 이 행위가 진정 악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젊은 시절의 여재화처럼 건축 위에 사람이 있다는 도덕성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과 악의 비율을 정의내기리란 어려운 일이다. 그 경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여재화는 점차 인간성을 회복해 가는 듯이, 구보승은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듯이 묘사되는 것과 그럼에도 구보승은 스스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도덕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과 일탈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호적 감정」은 표면적인 관계와 사람의 본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잉태기」는 진정으로 남을 위하는 사랑과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전한다. 「메탈」에서는 꿈과 현실, 그 사이를 만날 수 있다. 이렇듯 <혼모노>의 수록작들은 저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읽고 나서 곱씹어보면 곱씹어볼수록 생각할 거리가 풍부해지는 책이다. 아직 안 본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