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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May 12. 2021

벌레만도 못한 삶인 건가?​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책 표지에서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는 깃 빳빳한 하얀 와이셔츠에 중절모를 쓴 카프카에게 묻는다. 왜 하필이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벌레로 '변신'시켜야 했냐고. 가느다란 다리를 바둥거리며 넙적하고 딱딱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가족과 대화도 되지 않고, 끈끈한 점액질을 남기며 좁은 방 안에 갇힌 채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 그레고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하루아침에 벌레 신세가 되고만 것일까? 벌레로 변했으면서도 끝까지 출근 시간을 걱정하고 가족들의 미래만 관심 있어하는 그레고르의 마음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레고르의 쓸쓸했던 마지막 죽음이 의도된 자신의 결정이었는지, 고달픈 벌레 생활에서 얻어진 고통이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그레고르와 가족 간의 사랑과 행복의 모양새는 어떤 것인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작품을 읽는 내내 이 괴기하고 참담한 설정을 어떻게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쓸 수 있었는지 새삼 신기했다.


 얼마 전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읽은 참이어서 뭔가 이 '변신'에서 읽히는 가족들의 모습이나 상황이 조금은 비슷하게도 느껴진다. 유대인으로 자수성가한 사업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소심하고 나약하게 컸다고 하는 카프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가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하지만 문학작품인 소설 쪽에 가깝다는 평도 있으니 그것이 모두 카프카 자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순 없지만 편지 내용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변신'의 아버지가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편지 속 아버지는 사업에 대단한 성공을 거머쥐고 절대적 권위로 자신의 말이 모두 법이요 진리인 사람이었고, '변신'의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활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벌레가 된 그레고르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한다던가 가족을 해하려 한다는 착각에 사과를 던지는 등 아들에 대해 엄격함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아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편지 속 아들은 속을 털어놓으면서도 아버지가 상처를 입지 않기를 바라며 오해하지 않기를 몇 번이고 다짐을 했고, '변신'의 그레고르 역시 가족의 무탈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당연하다고 믿는 듯했다. 이런 가족과 '나'라는 관계 설정 속에서 그레고르의 입장과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 가족 안에서 그레고르의 존재와 내 존재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조금은 어려운 작품이었다.


 '변신'은 1915년 출판된 작품으로 카프카가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했다가 다시 만난 해이기도 하다. 그동안 카프카는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체 많은 방황을 했을 것이다. 물론 파혼의 원인이 아버지가 아니라 너무도 병약하고 나약한 자신의 탓으로 돌리긴 했지만 그런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혹시 벌레의 등장이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든다.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면서도 어두운 곳을 발발 거리며 기어 다니는 나약한 벌레로의 변신은 가족을 위해 경제 활동을 최우선으로 하던 그레고르가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상황이 왔을 때 가족들로부터 벌레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을 은유하고 있는 것 같다.  돈을 벌지 못하면 사람이지만 진정한 사람이 아니고 가족이지만 가족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돈을 벌어오고 부양하는 그 가족의 한낱 부속품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레고르 자신도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벌레로 변한 날에도 출근을 걱정하고 직장을 잃게 될까 걱정한다. 하지만 이런 그레고르와는 달리 벌레로 변신한 날, 가족들은 그레고르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멀찍이서 보고 가까이하기에 겁나 하며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지만 의논한다. 내 자식이라면 내 오빠라면 그 어떤 해결책을 찾지 못하더라도 감정에 북받쳐 몸으로 얼싸안고 울며 불며 하는 우리네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이런 상황을 견디면서도 그레고르는 가족 걱정 뿐이다. 그리고 이중적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어머니가 놀랄 것을 걱정하면서도 한 번쯤 와줬으면 좋겠고, 여동생의 행동을 말리고 싶으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인정하고, 아버지의 조금 남은 재산에 안도와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벌레로의 변신을 통해서 가족들에게 모멸감을 당하면서 그레고르는 역시 가족 내에서의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동안 자신은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지 그레고르 다운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는지, 자신의 꿈과 행복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오직 가족들의 평온한 일상과 여동생의 음악 학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그레고르와 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당연시되는 가족들 간의 문제. 아마도 카프카가 내민 문제의 카드가 여기 있는 듯하다. 인간 존재의 진정한 의미, 가족과의 관계,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벌레'로의 변신을 통해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족들에게 그레고르가 무엇이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였는지도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들 덕분에 노후가 안락하고 큰 집에서 살 수 있었던 부모와 경제력이 없는 부모 대신 오빠의 도움으로 꿈을 키울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여동생. 누군가의 희생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면 그 고마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가족이라는 무임승차로 끊임없는 희생과 노력을 강요받게 된다. 간혹 연예인들이 집 안 가장이 되어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작 그 자신의 행복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는데 그레고르 역시 가족들에겐 그런 존재였지 않나 싶다. 물론 그 속에 흐르는 사랑을 완전히 배제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벌레로 변한 아들과 오빠를 위해 뭔가 의미 있는 행동과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너무나도 습관화되고 고정된 그들의 관계로 가족들도 그레고르도 하나의 조립품처럼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만 꾸역꾸역 해내는 커다란 공장 속 부속품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가족 관계를 만들어낸 밑바탕에는 바로 물질만능주의의 사회가 있었을 것이다. 가족들마저 '돈'과 연결된 관계. 그래서 그 집의 수입원이었던 하숙생들이 그레고르 때문에 나가게 되자 가족들의 화는 극에 치달았고, 아빠는 그레고르를 방 안으로 거칠게 내몰았으며 누이동생 그레테는 '물건', '괴물'이라는 말로 그레고르를 멸시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동안의 고마움이나 사랑을 잊어버린 채 그레고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하게 된다. 그런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썩은 사과가 등에 박혀 상처를 입었던 그레고르는 몸과 마음의 상처로 시름시름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는 가족을 돌이켜 생각해 보며 감동과 사랑의 감정에 사로 잡혔다. 그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여동생보다 아마 자신이 더욱 단호할 것이다"


그동안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그의 모습에 놀랄 가족들을 위해 소파 밑에 있거나 이불로 몸을 가리거나 장의자 밑으로 몸을 숨겼다. 아버지의 발길질에 피를 흘리면서도 너무 놀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며 이해했고, 그레고르의 모습에 실신하는 어머니를 위해 나타나지 않으려 애썼고 누이동생의 입장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그 가족 누구도 그레고르가 인간이었던 시절 썼던 가구가 그대로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방향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레고르가 하는 절규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이 그레고르로 하여금 더더욱 절망으로 빠져 들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다.  


선물로 받은 '변신' 책갈피

하녀의 빗질에 쓸려나가는 그레고르의 죽음과 가족들의 힐링 여행. 그레고르의 변신으로 인한 괴로움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기대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일수록 어딘가 말라비틀어진 딱정벌레 같은 모습의 그레고르의 씁쓸한 죽음은 묘한 두려움마저 갖게 한다.

 나라는 존재란 무엇일까? 가족 안에서 사회 안에서 내가 차지하는 의미와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족들을 위한 사랑에 그 어떤 대가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가족이라는 것이 멍에가 되어 그동안의 본전이 생각나게 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레고르에게 그의 가족이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겐 가족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편안함을 주고 싶을 만큼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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