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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May 14. 2021

그날, 내 안의 비둘기가 떠났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를 읽고

비둘기를 만난 그날, 공포에 질려 허공에 있던 다리 하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납색의 매끄러운 깃털을 한 그것이 황소 피처럼 붉은 복도 타일 위에 갈퀴 발톱의 빨간 다리를 보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았다. 작고 둥근 원반 모양으로 머리털에 꿰어놓은 단추처럼 보이는 눈으로 조나단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것은 비둘기였다. 그리고 그 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조나단은 극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 공포의 사념은 비둘기에 놀라 방 안으로 후퇴한 자신을 질책하며 마치 죽음이 가까워 올 것 같은 생각에 사로 잡히게 했으며 조나단의 고단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시초가 되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는 조나단 노엘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어릴 적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상실감이 인간의 내면에 어떻게 잠들어 있다가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어떻게 극복되고 치유되는 지를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주인공 조나단 노엘은 1942년 7월 낚시를 갔다가 소나기를 맞고 집으로 돌아온 날, 어머니의 부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마저 사라지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에 맞닥뜨리게 된다. 수용소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조나단에게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지게 만들었고 누이동생과 둘은 생면부지의 친척 아저씨 집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조나단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오자 여동생이 소식 한 장 없이 결혼을 하고 캐나다로 떠나 버렸고, 삼촌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아내는 4개월 만에 아기를 낳고 다른 남자와 도피를 해 버리고 말았다. 조나단이 바란 것은 단조로운 평화, 그것 하나였는데 결국 아무도 이런 조나단의 평화를 지켜주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조나단의 어렸을 적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무너진 데서 오는 상실감이 가져다준 자기만의 소망이었을 텐데, 그것마저 가족이었던 여동생과 아내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조나단에게 사람이란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런 사람들을 멀리 해야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결국 조나단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찾아 프랑스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다행이도 은행 경비원으로 취직 되어 그가 원하던 단조로운 평화를 이어나가게 된다. 단순하지만 규칙적인 일과와 극히 제한된 사람들과의 관계, 애인처럼 자신을 보듬어 안아주고, 세상의 모든 풍파로부터 안전한 섬 같은 안식처이자 도피처가 되어준 24호는 그에게 자신만의 세상을 펼치는 그만의 아지트가 되어 준다. 그렇게 그는 매일매일 꽉 짜인 일과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상의 벽돌 깨기를 하는 것처럼 잔잔하게 살아간다.


 그랬던 것이, 어느 날 불현듯 복도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에 그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불확실성의 공포를 느끼며 일상 전체가 혼란에 빠짐을 느끼게 된다. 지점장의 출입을 인식하지 못했고, 공원 벤치에 빈 우유팩을 두고 온 것이 생각나 다시 돌아갔다가 바지가 찢기고, 거지의 볼쌍사나운 모습에 치를 떨며 불안하고 자기혐오에 가득 찬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 불안은 분노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한채 아무 데서나 엉덩이를 내보이며 용변을 보는 거지의 행동을 멸시했고, 하는 일 없이 두둑한 보수를 받으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카페의 웨이터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그날 오후 조나단 주위의 모든 이들을 향해 그는 증오와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한심해 보이는 관광객,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 마치 자신의 불안과 불행이 세상 때문에 생긴 거라는 듯이 조나단은 세상을 산산조각 내고 싶은 분노와 모든 것을 깡그리 재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뜨거운 여름 낮 은행 앞 층계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 고통스러움과 분노는 서서히 잦아들었고, 그는 마치 자기 힘으로는 조절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로는 방향을 틀 수도 없는 줄 끊어진 꼭두각시가 되버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호텔로 돌아가는 보행은 조나단의 마음을 달래줬다. 상처를 잊게 했고 살갗에 스치는 바람은 그의 감각을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관 같은 방에서 그의 인생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자살을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하지만 조나단이 잠을 자는 그날은 악천후였다. 새벽,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천둥소리 후 찾아든 침묵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모든 감각이 사라져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뛰어야 할지조차 모르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조나단은 어제 먹은 정어리 냄새를 느끼고 절대 토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 놓지 말아야 하는 아니, 놓을 수 없는 삶의 한 조각이었다. 마치 자살을 생각하고 벼랑 끝에 갔다가 다 하지 못하고 나온 집안일이나 주위 사람을 걱정하는 것과 같은 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조나단은 어렸을 적 진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의 지하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전쟁의 공포와 파괴되 버린 집에서 무서움에 벌벌 떨며 자신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울분을 토하던 어린 조나단이었다.   


" 그가 막 소리를 지르려던 참이었다. 남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애늙은이 조나단 노엘에게 너무나 다급하고 무섭고, 절망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침묵 속으로 크게 내뱉으려던 중이었다." (90P)


 그리고 그 순간 조나단은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게 된다. 어릴 적 소나기를 맞고 돌아오던 그 여름날의 신나는 빗소리. 어린 조나단에게 그 날 무더운 오후는 어머니가 사라져 버린 슬픔의 시간이었지만, 오늘 쏟아지는 비와 시원한 물웅덩이의 감촉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 그래서 조나단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애어른 조나단의 유희로 가득 찼고 되찾은 자유로 넘쳐났다. 그리고 예전에 귀찮고 싫었던 이웃들의 소리와 커피가 익숙하고 따듯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잠시 잠깐 그렇게 끔찍하게 여기는 비둘기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24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포가 사라졌음을 느끼면서.   


 조나단은 가족과 이웃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은 인물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아들을 보호하지 못한 부모님의 상실과 가족의 배신, 그리고 이웃들의 멸시는 조나단으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고 혼자 만의 세상으로 숨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조나단은 누구보다 이웃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인 사람이었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선택적 고독을 택했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어느 누구보다 사람을 그리워하고 관계 맺기를 바라고 있던, 결핍된 사랑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날의 상처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삶의 질서가 흐트러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감추어 두었던 자아가 세상을 향한 노여움과 증오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불평등하고 소외를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세상을 향해 돌을 던지듯이 조나단도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아픔을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조나단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조나단의 일상, 경비원으로서의 하루, 로카르 부인과 토펠 부인과의 만남, 분노에 찬 조나단의 마음과 천둥 번개가 치던 그 날의 상황을 짧지만 치밀한 묘사로 그리며 마치 그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그리고 그의 속내까지 철저히 분해하며 파헤쳐 표현했다. 게다가 인물의 내적 갈등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짧고 간결한 문장을 배치하여 읽는 독자까지 긴장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냥 쑥 읽고 지나가기엔 함축된 뜻이 너무 많은 소설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난 '비둘기'의 정체를 시대상과 연결할 때 독일군 정찰기 이름이 '비둘기'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조나단의 극한 공포의 출처가 어디인지 짐작하게 한다. 어린 조나단에게 전쟁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정든 집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평범한 일상을 깨뜨려버린 절망적인 이유였다. 그 이유를 예측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쳤을 때의 공포는 충분히 설득이 되고도 남는 부분이다. 그래서 작가는 '평화'와 '전쟁'이라는 이중적 비둘기의 모습을 마치 끔찍한 괴물인 양 그렇게 포진해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공포와 상처를 극복하는 조나단을 그림으로써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삶을 극복하고 헤쳐나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에서의 '수미상관법'처럼 '비둘기'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많이 닮아있다. 무더운 여름이라는 시간,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 천진난만하게 물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놀이처럼 지나가는 어린날의 조나단과 쉰이 넘은 조나단. 그러나 그 날의 결말은 많이 달랐다. 그날 조나단은 마음 속에서 '비둘기'를 미련없이 훨훨 날려버린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후 조나단의 일상이 많이 기대가 된다. 갑자기 콧노래를 부르며 이웃들에게 톤이 높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하며 싱글벙글 웃는 출근길을 맞이하지 않을까? 묘한 끌림이 느껴지는 다시 읽고 싶은 '비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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