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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Jul 05. 2020

실패와 두려움의 변주곡

                '혼자'라는 두려움에 대처하는 나만의 극복기

 일부러 아이가 없는 삶을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큰아들 큰딸이 만났지만 어쩐지 분위기는 막내아들 막내딸이 만난 것 같았던 우리는 좋은 친구처럼 연인처럼 그렇게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어머니와 부엌에서 김밥을 만들다가 그냥 한 번 집어 먹었던 신김치가 어쩐지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맛있다'라는 나를 보며 어머니께서도 '맛있냐?' 하셨다. 왜 물어보시는 거지? 하고 그냥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나의 임신을 직감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일주일 후 이상한 예감에 테스터기로 검사를 했더니 '임신'이었다. 두 줄이 선명했던 테스트기엔 내가 엄마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의지가 확실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임신. 얼떨떨하고 부담이 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당황하던 그때, 엄마 자격이 없는 날 질책하는 건지 아님, 지금은 준비가 안 됐다고 경고를 하는 것인지 야속하게도 아기는 얼마 되지 않아 유산이 되고 말았다. 긴 시간도 아니었고, 크게 모성애를 느끼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은 어쩌질 못했다. 주위에서는 유산도 출산과 같은 일이니 몸조리 잘해야 한다며 이것저것 챙겨 주셨고 식구들은 다들 내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고. 한 번 실패를 겪고 나자 뒤늦게 임신 전에 미리 해야 했던 일을 그제야 챙기기 시작했다. 풍진 주사도 맞고, 산부인과에도 가고 한약도 지어먹고, 심지어 어른들 손에 이끌려 마을 뒤편에 있던 '당'도 찾아갔다. 당에서는 기도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인사를 해서도 안 되고 뒤를 돌아봐도 안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갑자기 커진 관심이 부담이 되기도 했고, 결혼하면 아기를 낳고, 집을 짓고, 땅을 사는 순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순서대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살라고 억지로 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들 대동소이하게 그런 수순으로 삶을 계획하고 설계했다. 모두가 공산품 찍듯 똑같은 순서를 밟아야 한다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단계가 합당하지 않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부산스러웠던 주위와는 달리 정작 우리는 아이 갖는 것에 너무 큰 부담을 갖지 말고 시간에 맡기자고 의견을 모았다. 자연스레 생기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둘이서 만이라도 재미있게 살자는 게 남편과 나의 생각이었다. 위로였는지 진심이었는지 그때 우리들의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가족을 이십 년째 남편과 나, 둘로 한정 짓고 있다.  

 가끔 육아에 지친 친구나 경제를 고민해야 하는 지인들을 볼 때면 둘이 살아도 괜찮구나 느낄 때가 많았다. 여유도 없이 하루 온종일 동동 거려야 하고 무엇을 하든 간에 내가 아닌 '남편'을, 내가 아닌 '아들과 딸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그네들을 보며 어쩌면 우리의 결정은 우리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잠깐 생각도 했다. 하지만 또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힘들고 지치다고 푸념하는 와중에도 자식과 교감을 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질 않았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바라보는 그 눈길에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 보였다. 내 눈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런 눈빛, 무한한 사랑과 신뢰로 무장한 그 눈빛을 보며 아들이 뭔지 딸이 뭔지 생각하게 되곤 한다. 하지만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가끔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와르르 무너지곤 했다. 모든 국민들이 바쁜 '어버이날', '어린이날'에 또는 우리들의 '생일'에 둘 밖에 없는 우리는 자발적 소외를 당해야 했고 섭섭함도 생겼다. 귀찮게 야외를 가지 않아도 되고, 돈이 들지 않아서 좋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어도 된다고 위안을 삼지만, 그런 날은 그저 우리에겐 편히 쉬는 휴식일 뿐인데도 편한 몸 뒤에 허전한 맘도 사실 있었다. 거기다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쉰이 되고 보니 이제는 미래에 아니, 어쩌면 가까운 시간 안에 '혼자'가 될 때를 떠올리며 막연한 두려움까지 생겼다.


 지금이야 둘이서도 알콩달콩 괜찮겠지만 만약 남편이 잘못되거나 내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땐 어떡하지? 지금 시대는 자식 아무 소용없으니 걱정 말라는 주변의 소리도 있는 사람들의 여유라 여겨질 정도로 앞으로 닥쳐올 우리들의 노후는 안정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무서움도 함께 동반하고 있는 중이다. 우스개 소리로 남편은 내가 죽고 나서 다 정리한 후에 자기가 죽을 거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기도 장담하지 못할 일이란 걸 나도 남편도 잘 알고 있다. 더구나 자식이 없는 삶은 우리의 선택이었으니 그 책임도 의무도 마땅히 우리의 몫임을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다독이면서도 '혼자'라는 삶의 주는 달콤 쌉싸름한 맛은 나에게 어느 만큼의 두려움이나 무서움으로 다가올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힘껏 예측 가능한 것은 하나씩 그 위험도를 낮춰볼 생각이다.

 사실 '두려움'이란 그 실체를 안다면 그리 무서워할 것은 못 된다. 목표가 없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어떤 곳을 선택해야 할지 어느 쪽이 내가 가는 곳이 맞는지를 모른다면 두려움이지만 방향이 분명하고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면 어려움은 있겠지만 못 할 일은 아니란 생각이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은 장점이나 실패로 간주될 수 없다'라고 했다. 사비나가 여자로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은 이상 그녀는 여성이라는 것이 실패도 장점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아이가 없는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선택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이가 없는 삶'이 안전한 장점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움이며 내가 받아들여야 할 나의 또 다른 삶이고 나의 인생일 뿐이다.  


  '노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두려운 건 '치매'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 아직까지 주위에는 없지만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이야기는 절망 그 자체다. 사랑을 잊어버리고 생활을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나'까지 잃어버리는. 그때 내 옆에 누군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중병에 걸려 간호하는 사람 없이 병원 한구석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내 죽음을 아무도 모른 채 며칠 동안 아니, 몇 달 동안 내팽개쳐져 있다면?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이어지고 있는 내 삶을 내가 제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 손에 정해지게 된다면? 미래에 대한 막연함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두려움에 나를 맡기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 삶이 '실패'가 아니듯 '두려움'이 극복 못 하거나 정복하지 못할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순간순간의 행복을 알아가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뜰살뜰 챙기는 거. 이것이 나의 '두려움' 극복기의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실패가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실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전초전이고 예고편이며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패를 실패로만 보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자격이 없다.  그 누구도 이것이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 없고 어떤 것을 실패라고 규정지을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는 자신이 그렇다고 느낄 때, 무기력함에 나를 맡겨버릴 때, 그것이야 말로 진짜 실패가 아닐까? 아이 없는 삶을 내가 실패라고 보지 않고, 실패라고 할 수도 없는 거처럼 또 꼭 성공한 삶을 누려보겠다 욕심 부린 적도 없으므로 나는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에서의 두려움을 자연스레 흘러가게 놔둘 작정이다.

그 대신 실패와 도전에 대한 나만의 변주곡을 만어 보고 싶다. 도무지 맞지 않을 것 같은 음이 만나 새로움을 선사하듯 실패와 두려움도 생각지 못한 특별한 화음을 만들어 낼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실패를 했다는 것은 다시 못할까 봐, 또는 손가락질을 받을 까 봐, 아니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용기를 내지 않을까 봐, 주저주저할까 봐, 외면해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회식으로 남편이 늦게 들어온다고 전화가 왔다. 집안은 무의미하게 켜져 있는 텔레비전과 타닥타닥 거리는 노트북의 소리뿐이다. 텔레비전 소리라도 없다면 집안은 적막 그 자체일 것이다. 창밖은 컴컴해지고 주위마저 고요한 밤은 내가 이렇게 '혼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더 하게 만든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던져진 '혼자'라는 느낌은 아마도 물 밑으로 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일 것이고 소리 없는 세상에 내 목소리로 공간을 채워야만 안심이 되는 그런 것일 것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것처럼 살 수 있는 방법엔 뭐가 있을까? '나 혼자 산다'처럼 무수히 많은 일을 벌이고, 도전하고 함께 하는 삶은 각본대로 움직이는 예능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그들처럼 살면 좋겠다고 하면 순진한 생각이라고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내 노후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장소를 함께 누리는 그런 삶을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삶을 마무리할 때,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잠깐 단잠을 자듯 그렇게 세상과 이별할 수 있다면 정말 걱정이 없겠고, 혹시 혼자 남았다가 하늘이 부를 때가 오는 순간이 있다 해도 그때 아무런 욕심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작별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나도 내 삶이 즐거운 봄날의 소풍이 되고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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