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경험의 그 떨림에 관하여'
오십 평생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사치'라면 사 년 전부터 해오는 마사지다. 바람에 혹사 당해 거칠어지고 홍조 때문에 화장이 잘 안 받을 때도 있고, 햇볕에 달구어진 피부를 좀 달래고자 찾았던 곳이 마사지 샵이었다. 이 돈이면 생활비가 얼마고, 외식이 몇 번이고 하며 오락가락 계산만 하다가 오롯이 나만을 위해 '덜컥' 카드를 긁고 보니 혼날 짓한 학생처럼 며칠 내내 안절부절이었다.
첫 마사지를 받던 날, 한 시간 내내 곡소리를 내야 했다. 어깨며 등이며 목이 안 뭉친 데가 없어서 맛사지사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악악' 소리가 끊이질 않고, 나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빳빳해져서 '숨 쉬세요', '힘 빼세요'란 말을 몇 번이고 들어야 했고 어깨를 마사지하고 있는데 멀리 있는 발가락만 꼼지락꼼지락 빼 질 빼 질 대며 바둥바둥거렸었다. 하지만 마사지가 끝나고 나서의 그 시원함이란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뭔가 몸 한가운데에 고속도로가 뚫린 듯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서 '시원타' 말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라더니 온몸 구석구석 묵직한 아픔이 있었는데도 지나고 보니 저절로 '시원타' 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한 주 두 주 마사지를 받다 보니 이제는 좀 더 세게 마사지해 달라고 하기도 하고 이래 저래 요구 사항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프다기보다는 시원하고, 시원하니 잠이 솔솔 오고, 깨어 보면 기분 좋은 나른함이 번져 푹 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얼마 전 그 마사지 샵에 새로 직원이 들어왔다. 이미 원장님 손길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새 직원의 손길이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샵의 질서가 있으니 못마땅한 티를 낼 수도 없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지막 마무리로 내 얼굴에 붙이는 팩을 그 직원이 맡아하게 되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내 귀 곁에서 맴돌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달그락달그락 팩을 만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붓으로 얼굴에 해초 팩을 붙이는 모양인데 원장님이면 한 두 번 쓱 지나가면 끝날 일을 첫 붓질이 끝나고 나서도 내 얼굴에 몇 번이나 붓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한 번 바르고 나서 다시 덧바르고 코 옆을 살살 다시 칠하고 조금 멈췄다 싶어 끝났나 싶으면 다시 그 붓이 얼굴을 쓸었다. 내 얼굴이 이렇게 컸었나? 이제 한 숨 자려니 다시 귀 옆으로 붓질이 시작되었다. 어설픈 손길에 짜증이 날 듯 날듯 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눈을 감고 있으니 그 직원이 어떤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얼마나 긴장하며 조바심 내고 있는지 환히 보이기 시작했다. 네모 반듯한 얼굴도 아니고 이리저리 굴곡이 있으니 안 칠해진 곳은 없을지 찾고 있을 것이고, 혹시 한 번 칠했으나 빈 곳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필 것이고, 손님의 표정도 주의 깊게 봐가며 조심조심 살 어름판을 걷는 그 마음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능숙한 원장님보다 몇 배 더 정성을 다하는 것 같은 초보의 손길이 더하기 빼기를 하는 손님에서 나를 엄마의 마음으로 바꿔 놓았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아니요,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어느 분야든 누구든 '첫 경험'이라는 것이 있다. 나 역시 공부를 끝내고 아이들 앞에 맨 처음 섰을 때 그 긴장된 떨림과 가슴의 쿵쾅거림은 잊을 수가 없다. 몇 시간 준비해 온 것을 다 풀어내지 못해 동동거릴 때도 있었고, 중요한 내용만 빼뜨리고 온 것 같아 아쉬움이 가득했던 때도 있었다. '재미없어요', '언제 끝나요?'란 말엔 지금도 상처를 받기도 한다. 온 정성을 다하고 목이 터져라 가르쳤는데 오해를 한 학부형 때문에 마음 다치기도 하고, 교실 안에서 아찔한 사고가 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어 강사로 외국인 학생들을 처음 만났을 때도 '1.2,3'은 가르치겠는데 '하나 둘 셋'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간단히 한국의 고유 숫자라고 해도 될 것을 난 기초 반 아이들에게 장황한 설명과 제스처로 더 어려운 수업을 만들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나의 '첫 경험'은 실수 연발, 상처 투성이었던 것 같다. 어디 첫 경험이 그뿐이었을까?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외국 여행을 처음 갔을 때도, 결혼식에 첫 발자국을 뗄 때도, 부모님과 시댁에서 헤어질 때도, 남편이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내 집을 처음 갖게 된 날도, 처음 요리라는 것을 했을 때도 그 어리숙한 첫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작은 디딤돌이 되었을 것을 지금 이 직원의 첫 경험을 내가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서툴지만 정성스럽고, 조심스럽지만 최선을 다했고, 머뭇머뭇거렸지만 내 손으로 끝을 내고 싶은 악착같음도 있었던, 결과에 대한 조바심으로 실력을 다 보이지 못했을 때도 있었던 나의 '첫 경험'. 시간이 흘러 그 첫 경험의 알싸한 맛을 잊어 원래 그랬던 것처럼 거만함과 익숙함의 족쇄에 묶인 지 너무 오래됐던 것 같다. 오늘 그 신입 직원의 손길을 느끼며 이렇게 나의 '첫 경험'이 기억의 두레박을 따라 올라와 준 것이 많이 고마웠다.
이젠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던 나의 '첫 경험'은 작년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되고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이래 저래 응모도 해봤고, '덜컥' '수필가'라는 이름도 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또 겪게 되는 '첫 경험'이 생기고 있다. 먼저 내가 쓴 극본으로 인형극이 완성되는 그 첫 기쁨을 5월에 맛볼 수 있을 것이고, 문화예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올 연말엔 내 첫 수필집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화를 쓰는 첫 경험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몇 년 후엔 내 집을 짓는 첫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십여 년 후엔 퇴직을 한 남편과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첫 경험도 긴장되지만 강단 있게 두렵지만 설레게 받아들이고 싶다.
지금도 도서관이나 학교에서의 첫 수업은 마냥 떨리고 조심스럽다. 그 날은 옷도 신경 쓰고 화장도 정성스레 하고 기분 좋게 들어가려 애쓴다. 운전하고 가면서 '나는 할 수 있어' 소리도 지르고, 시끄러운 노래도 흥얼거리며 그 긴장을 잠재우려 마음의 찌꺼기들을 토해내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소설의 첫 장을 걷을 때면 묘한 긴장감이 생긴다. 도입 부분이 새로울수록 생각지 못한 첫 문장일수록 그 긴장은 묘한 설렘으로 뒤바뀐다. 택배가 도착했을 때 박스를 열어보고 실물로 첫 눈 맞춤을 했을 때 그때의 신선함은 첫 데이트에 눈도 못 마주치고 두근만 거렸던 그 순간과 비슷하다.
소심한 첫술이지만 행복한 배부름을 낳게 하고 소심했던 첫 삽이 새로운 건물을 올리며 뿌듯함을 선사하고 소심한 첫걸음이 산 정상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첫술에 배까지 부를 순 없지만 그 첫술이 없고서야 결과도 없을 것이다. 첫술의 고마움을 느끼는 오늘, 그 시작을 나는 어떻게 했나 되돌아본다
언제까지고 매일매일이 새로운 '첫 경험'이고 싶다. 하루하루가 처음 눈 뜨고 감을 때까지 어제와 다른 새로움이고 처음일 테니 눈부신 봄 햇살만큼이나 처음으로 빛나는 삶을 맛보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