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시나물 Apr 12. 2021

질투 끝에 남은 건.....​

-어느 밤 혼자만의 반성문-

 오늘 밤은 질투의 끝을 보여주는 치졸한 시간이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사랑의 질투도 아니고,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 '그럴 수 있어'하며 인정하는 그런 질투도 아니었다. '질투' 원초적인 의미를 그대로 보여주었던 부끄러움의 극치일 뿐이었다.

'코로나'로 대면대면하던 후배들과 반가운 만남을 가진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새빨갛게 달구어진 불닭과 맥주를 앞에 두고 시간제한 금지가 끝난 것을 소소하게 자축할 겸 친한 후배들과 얼굴을 보는 자리였는데 그 날은 불닭의 알싸하고 아린 맛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맵고 짠맛이 뒤엉켜 뒷맛이 씁쓸했다.

 사실 그 후배는 아무 잘못도 없다. 스물 몇 살부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를 좋아한다, 나처럼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같은 과 후배였다. 그래서 내가 학원 강사였을 때도 같은 학원 강사였고, 내가 방과후 강사였을 때도 내 뒤를 쫓아 방과후 강사를 했다. 내가 한국어 강사가 됐을 때 그 녀석은 자격증도 없이 또 '턱' 하니 한국어 강사가 됐다. 난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혼자 알아서 세상을 거리낌없이 헤쳐가던 그 녀석은 많이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앞에서 많이 끌어달라고 친언니 대하듯 살갑게 다가왔고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솜씨도 좋아서 봄이면 달래를 캐다가 달래장을 만들어다 주고, 쑥을 한 바구니 캐어 가래떡을 만들어 나눠줬다. 기름 칠한 후 살살 굴려가며 구운 가래떡에 꿀을 '콕' 찍어 먹었을 때의 그 달콤함은 잊을 수가 없다. 텃밭에 농사를 지었노라 호박을 갖다 안기고, 가끔 직접 담근 국간장을 건네기도 했다. 말이 후배지, 모든 것이 언니였다. 수업 외엔 모든 것이 서툴고 철딱서니 없는 나와는 달리 그 녀석은 빠릿빠릿 못하는 것이 없는 전천후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만난지 십 수년이 지나다 보니 이젠 누가 선밴지 누가 후밴지도 모르는 지경이 됐다. 언제나 그걸 할 수 있을까요? 하던 그 녀석이 수업도 점점 많아지고, 더 바빠지고, 다방면에서 활동의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여러 주변 여건으로 정작 난 못하게 된 수업도 있고, 안 하는 수업도 있고 해서 한가한 요즘, 여전히 바쁘게 시간을 쪼개며 동분서주하고 있는 후배에게 가끔 농담조로 열등감 느끼니 출근한다 말하지 마라라며 웃으며 말했었는데 지금보니 그 안에 정말 나의 쪼잔한 마음이 담겨 있었나 보다.

 술잔을 기울이며 잠깐 나온 수업 이야기에 보통 때와는 다르게 열이 '확' 올랐다. 모르고 있다면 그게 아니라고 잘 가르쳐주고 참고 사항도 일러주고 요령도 가르쳐줬어야 하는데, 그 순간 무엇에 속이 뒤틀렸는지 나도 모르게 말을 배배 꼬아가며 한심하다는듯 쏘아부치며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내 심보의 밑바닥까지 까보이며 후배 속을 후벼 파고 말았다. 일방적으로 나의 몰아붙임을 당한 후배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쩔쩔매는 듯했다. 후배도 지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그 나름의 이유를 들어가며 막무가내 선배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되어 갔지만 자신의 지푸라기는 놓지 않았다. 그것이 더 화를 부채질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젠 그러지 않는 후배에 난 더 열을 올리며 무슨 큰일이라도 터진듯 그렇게 씩씩 거렸다. 도대체 난 무엇을 위해 그리 열을 냈던 걸까? 준비가 안 된 상대를 가장 예리한 무기를 들고 죽자고 덤벼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정말 내가 한 말이 그 후배를 위한 나의 진심이었을까? 냉랭해지고 어색한 시간이 한참 른 후 남은 건 후회와 부끄러움 뿐이다. 그래 놓고도 내 행동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나의 못된 이기심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남 탓이나 하고 있는 그 녀석이 어이없다는 둥 이해가 안 된다는 둥 남부끄러울 핑계만 찾고 있었다. 지금의 한가함이 난 좋아, 이제는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도 되지 않았어? 하면서도 그게 아니었나? '코로나' 덕분에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게 되서 이 시간을 즐기고 싶다고 말해왔던 건 위선이었나? 아니었다. 난 정말 진심으로 이젠 내가 좋아하는 일로만 시간을 채우고 싶었는데. 그동안 내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지 못하고 또 다른 나의 자존심으로 눈 가리고 아옹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것이 진심이고 어느 것이 욕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쉬고도 싶고, 좋아하는 걷기도 하고 싶고, 음악과 책을 사랑하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수업도 많이 하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고. 이게 무슨 앞뒤가 맞지 않는 이율배반적 터무니 없는 욕심인지.

  당혹감을 가득 담은 후배의 눈이 잊혀지질 않는다. 질투의 끝을 보여준 그 날, 나는 그 눈을 회피하며 끝까지 못되게 군 나의 치졸함과 옹졸함으로 술을 먹고 안주를 마셔댔다.  


 깨진 쪽박을 이어 붙일 수 없고,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질투의 화신이 되었던 내 모습을 지울 수는 없다. 혼자 있다가 그 시간이 떠오르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화끈 거린다. 환경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구나.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동안 내 주위를 어지럽게 했던 마음들이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대놓고 폭발하게 만드는구나. 많이 당황했을 그 녀석에게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지금 많이 반성 중이다. 비겁하지만 외면해 버리려고도 하고 이젠 '아웃이야'하고 등을 돌리려 했었는데 오늘 엄마 산소엘 갔다 와서 맘이 안 좋다는 카톡을 받고 나서는 다시금 그 날의 내 모습을 뒤돌아봤다. 후배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마음 아픈 것만 앞서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내 눈으로만 주위를 돌아다보니, 나만 속상하고 나만 능력 없고 나만 화가 나는 시간이 앞서 상처 받은 후배의 얼굴을 보지 않고, 미안함을 감추고 마음의 부채감을 모른척 하려 했던 내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   


 창 밖으로 바람 소리가 거세다. 봄이었나 싶으면 다시 겨울이고, 꽃이 피나 싶으면 몹쓸 바람은 잠깐의 화려함도 용인하지 않고 모두 쓸어버리고 화를 내고 있다. 초록 세상에서 꽃구경, 나무 구경 마음 놓고 한 번 해 보는 일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봄이 오려는 걸 시기한 '꽃샘추위'는 따뜻하고 포근한 봄이 오는 여정이려니 기분 좋게 견디면 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서 '질투'만 하는 '질투'는 못나기 그지없다. 내가 가지지 못한 다른 것들을 '질투'하며 '나'를 변화시킨다면 그건 '질투'의 선한 영향력이고, '질투'하면서 그를 '인정'하고 부러워하면 그 '질투'는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위로라도 받을 수 있지만 나는 '질투'를 '시기'로 끝낸 가장 밑단계의 어이없는 '질투'를 하고만 것이다. 부질없던 '질투의 끝'은 이렇게 나를, 자기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산엘 올랐다가도 시간이 되면 내려오고, 철없다가도 삶의 여정을 겪어내는 동안 어른이 되고, 때가 되면 후배에게 물려주고, 한 발 뒤에서 조금씩 조금씩 길을 달리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또 함께 갈 수 있는 넉넉함이 있어야 했는데 여전히 나는 성숙하지 못한 어줍잖은 미생인 모양이다.


 후배에게 답장을 했다. 시간이 나면 차 한 잔 같이 하자고. 그리고 그날 나의 몹쓸 행동과 말이 상처가 됐다면 정말 미안하다고 말해줘야겠다. 항상 활기차게 생활하는 너를 질투했다고. 승승장구 자기 길을 멋지게 올라가는 너를 부러워했노라고. 못난 선배를 이해하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소심한 첫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