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동아리' 체험기-
잠이 오질 않았다. 수업을 직업으로 하고 있으니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에 대해 그리 큰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핸드폰을 해봐도 책을 읽어봐도 몇 글자 끄적여 봐도 이미 잠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아무리 잠을 청해도 머릿속은 점점 또렷해지고, 고요한 침대가엔 '윙'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얼핏 잠이 들었나 보다. 12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투덜댔더니 동아리 밴드엔 격려와 위로의 댓글들이 한가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으라찻차' 노래까지 링크가 된 채로~~
내가 독서대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제1회 제주독서대전부터였다. 활동하는 도서관이 주관이니 힘을 보태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행사 기획을 하기도 하고 직접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독서 골든벨'을 준비하기도 했고, 시원한 숲 속에서 여러 동아리 패널들을 모시고 '숲 속 수다방'을 열기도 했다. 이번엔 특별히 제주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독서대전이다 보니 규모도 훨씬 크고 전보다 부담이 몇 배 됐다. 이번엔 '아무튼 동아리'라는 포럼에서 내가 속한 우리 독서 동아리를 소개하는 일을 맡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무관중을 기본으로 한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되었는데 관중들이 없어 편할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오히려 카메라가 훨씬 더 무서운 법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독서 동아리는 제주시 우당도서관 '늘익는독서회'다. 2002년 어머니 독서회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전화기를 들었다. 어머니가 아닌데 가능하냐고(지금도 어머니는 아니지만). 흔쾌히 괜찮다고 대답을 해 준 사서 선생님과 통화한 후 첫 모임을 가졌다. 우리들의 첫인상은 어땠을까? 간호사 출신 언니 두 명, 아직 아가씨 티를 벗지 못한 나, 대학 후배 한 명, 그리고 가정주부라는 한 분. 이렇게 직업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른 다섯이서 첫 모임을 꾸렸는데 마침 나이도 좀 어리고 아이들을 만나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덜컥 내가 회장일을 맡았다. 처음엔 부담이 없었다. 그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수다 떨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이런 나의 예상은 얼마 못 가서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말았다. 내가 만났던 사서 선생님(지금은 다른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나의 든든한 백이다.)은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하는 그런 분이 절대 아니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고 도입하고 적용하고. 못 하겠다, 자신 없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 못할 거 없다, 별거 아니니 할 수 있다로 우리를 설득했다. 사서 선생님이 아무리 열정적이라 해도 억지 춘향은 안 되는 것이었을 텐데 우리 팀에도 선생님 못지않은 적극적인 행동파 언니들이 있어 최상의 궁합을 만들어 냈던 거 같다.
처음엔 내 아이에게 좋은 책을 읽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림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그림책을 어른들이 읽는다는 것을 별로 이해받지 못한 때였던 것 같다. 초등학생은 동화책을 읽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림책은 유치원생이 읽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우리는 그림책에서 새로운 구절을 발견하고 숨은 의미를 찾고 그림이 주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차츰 주제를 넓혀 역사, 인물, 제주도의 신화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과 더불어 도서관과 함께 여러 활동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찾은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 봉사를 시작으로 여름 겨울 독서 교실의 보조 교사로, 가족 독서 캠프로 일 년에 한 개 하던 행사가 두 개 세 개로 늘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찾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기 위해서 어떤 책이 좋을까? 어떻게 읽어야 할까를 고민하던 회원들의 열정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도 막상 아이들 앞에 서면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책 장을 두 장씩 넘겨버리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얼마나 당황했던지. 여름 독서 교실에 온 강사들의 보조가 되어 하나라도 빠트릴라 얼마나 노심초사했던지. 가족들을 초대해서 캠프를 하려니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햐 했는지. 그러다 보니 모임 안에서는 갈등도 많았다. 책이 좋아서 책을 읽으려고 왔는데 왜 이런 행사까지 해야 하냐며 모임을 탈퇴한 회원들도 있었다. 나 역시 몇 번 회를 탈퇴할까 하는 고민을 했다. 그때가 서른두 살. 일도 많이 바빴고, 정신이 없었던 터라 행사를 하려고 도서관을 가는 게 조금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여름 독서 캠프는 왜 그렇게 내 휴가일과 겹치는지. 휴가를 가자니 힘들게 캠프를 진행하는 회원들이 걸리고, 안 가자니 나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결국 그만두겠다는 말을 뱉고 말았다. 그때 언니들이 '회비만 내고 있어. 조금 쉬었다가 와. 네가 꼭 있어야 해. 내가 다 하고 있으마'로 나를 말렸고, 나는 이 삼 년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캠프에서 빠지고 하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지금껏 함께 활동을 해 오고 있다.
포럼장은 큰 소리로 말하기가 미안할 만큼 조용했다. 무관중이니 몇몇 스텝들만 카메라와 장비들을 챙기고 있었고, 관계자 몇 분과 발표자들만 대기해 있었다. 포럼장엘 들어오기 전 주차장에서 우리 회원들을 만났다. 며칠 전부터 들어갈 수 없더라도 주차장에서 동영상을 보며 응원을 하겠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오지 말라고 더 부담스럽다고 말렸는데 그 걸 못 참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커피와 빵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겉으론 왜 왔냐고 타박을 했지만 언니들이 있어서 비가 내리는 스산함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나는 좀 개인주의에다가 이기적인 면이 있어서 남을 챙기거나 배려하는 것이 좀 모자란 편인데 이 극성스러운(?) 언니들은 항상 작은 짐이라도 같이 들자는 주의였던 것 같다. 하긴 십 수년 동안을 무슨 일이든 그렇게 '오지 마라 할 필요 없다'는 나와 '그래도 같이 해야 한다'는 언니들과의 싸움에서 항상 내가 졌던 걸 금세 잊었던 모양이다. 언니들은 무거운 짐을 나한테만 맡긴 것 같아 미안하다고 열심히 하라고 잘할 거라고 격려해 줬다.
드디어 아나운서의 소개 멘트가 시작되었다. 막상 무대에 서고 보니 발표 시간을 기다리는 게 더 초초하고 긴장이 되었던 거지, 자료를 보며 발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우리 모임의 탄생부터 읽었던 책, 문학기행, 독서캠프, 회원들의 말, 회원 자녀들의 이야기까지 앞 뒤 없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할당된 시간은 다 채우고 무대를 내려왔다. 시원 섭섭했다. 그리고 아쉬운 점도 많았다.
기다리던 언니들과 점심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 좀 받아보라며 넘겨받은 휴대폰에서 우리 회원 언니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회원 카톡 방에서도 눈물이 났다는 글들이 많이 있었다. 결코 울 내용이 아니었는데 왜 우냐고 울지 말라고 달랬다. 어떻게 이리 순수하고 여릴 수 있을까? 다들 내가 발표한 내용보다는 이제껏 모임을 유지하며 보내왔던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보다가 울컥했던 것 같다. 18년 동안 몇 번의 위기도 있었다. 갑자기 빠진 회원들에게 섭섭하기도 했고, 독서캠프를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커피숍에서 울고 불고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언니와 의견이 달라 일 년 가까이 얘기를 안 하고 지내다가 둘이 섭섭하다고 네가 그러면 안 된다며 드라마를 찍은 적도 있었다. 내가 빠져도 잘 돌아가는 캠프에 시샘이 나기도 했고,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아마도 끈끈한 아교풀이 되어 결코 끊어지지 않는 든든한 인연의 줄을 만든 모양이다.
포럼은 끝났다. 나도 그간의 추억 여행에서 몸을 내려놨다. 아무도 없는 오전에 나 혼자 다시 동영상을 틀었다. 왜 그리고 버벅대던지, 왜 그렇게 똑같은 어조로 심심했는지.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왠지 지난 시간 속 바쁘게 뛰어다니고, 목소리 높여가며 열정적이었던 삼십 대, 사십 대 그때의 내가 뿌듯하게 느껴졌다. 이제 우리 모임은 실버 타운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다들 자식은 나중에 필요 없다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살자고 약속했는데....... 그게...........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