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시나물 Nov 10. 2020

'고기오'에서 찾은 해답

-'닭인지 아닌지 생각하는 고기오' 를  읽고-

"선생님, 여기 다문화 아이들만 오나요?"

"왜? 다른 친구들도 같이 하고 싶어?"

"아니요, 다문화 친구들만 왔으면 해서요"

아닌 게 아니라 수업 후 수업 평가하는 설문지에 다른 것은 모두 '매우 그렇다'로 표시를 했는데 '친구에게 이 프로그램을 추천하고 싶습니까?'라는 란에는 '그렇다'로 체크가 되어 있었다.

 


 지난주 다문화센터에서 수업을 했다. 아주 야무지고 똑 부러질 것 같은 자매가 센터를 찾았다. 첫 수업이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의 수업과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다. 다른 때와 다름없이 즐겁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오늘의 수업 주제는 '이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그림책을 주재료로 아이들과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수명을 길게 하는 것들을 모두 모아서 이름을 지었다는 어느 영감님의 안타깝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아이들은 리듬을 타가며 신나게 주인공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책도 보고, 퀴즈도 풀고 먹는 클레이로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보고, 이름 속에 담긴 낱말도 찾아보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름이 주는 느낌과 이름이 주는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제는 수업이 끝난 후 이 아이와 이야기를 할 때였다. 똑떨어진 단발머리의 그 아이는 나에게

 "선생님, 저는 어느 나라 사람인 것 같나요?"라고 물었다. 처음 들어올 때는 긴장감도 엿보였고 좀 딱딱한 얼굴에 말도 없을 것 같더니 온몸으로 함께 책을 읽다 보니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열어준 것 같아 내심 장난기도 발동해서

"중국인가?"라고 했더니 단박에

"아니요, 우리 엄마가 일본 사람이에요"하는 거였다.

"그럼 일본어도 하고 한국말도 잘하고 좋겠는데"

"우리 엄마는 영어도 할 수 있어요"하는 아이의 얼굴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왜 자기가 친구에게 이 수업을 추천하고 싶지 않느냐면 지금은 6학년이지만 2학년 때 반에서 왕따를 당했다는 거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 아이는 쉽게 얘기를 꺼냈지만 이름을 바꾸고 학교를 바꿔서 지금 우리 반 아이들은 자기가 다문화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얘기를 할 때엔 내 가슴 한쪽이 '싸아'해졌다.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소개하면 안 됐던 것이다. 모두가 다문화 친구들이라야 물어볼 필요도 없고 다르다는 느낌 없이 설명하지 않고 그냥 함께 수업만 하면 되는 것이니 우리끼리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여기서의 '우리'안에 학교 친구들은 없었다. 마음을 터놓고 함께 웃고 놀고 떠드는 바로 옆 친구들에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빙 둘러 먼 곳에 와서야 마치 제 집을 찾은듯한 그 아이의 얼굴을 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 수업 온 친구가 모두 다문화라는 사실에 아이는 안심을 했고 훨씬 표정도 밝았고 신나 했다. 내 눈에는 여태껏 수업을 하던 똑같은 아이들인데 왜 그렇게 우리는 경계하고 피하고 안 하는 것이 많은지. 어릴 때부터 다리를 떨어서도 안 되고, 저녁에 휘파람을 불어서도 안 되고 짧은 치마를 입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출하거나 튀거나 달라서도 안되고. 이미 '문화'라는 말속에 다양함과 다름이 존재하고 있을 터인데 또 '다문화'라는 이름을 붙여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엔 몇 개의 벽을 또 만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함께 우리 속에 스며들어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그 답을 나는 아이들의 동화 '닭인지 아닌지 생각하는 고기오'에서 찾았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싶어 방황을 하던 고기오라는 주인공이 닭이라는 확답을 받기 위해 날 수 있다는 비밀을 지키다가 위험에 빠진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날 수밖에 없었다는 그래서 닭들이 고기오를  자신의 종족인 닭으로 인정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내가 감동했던 장면은 그다음이었다. 닭들은 고기오를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나는 연습을 시작한 것이었다. 벼랑 위에서 한 줄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하는 닭들. 그들에게 다칠 수 있다는 무서움이 없었을까? 왜 내가 '고기오'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없었을까? 그런데도 그들은 닭들은 날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고기오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들 스스로 '고기오'를 받아들이기 위해 바뀌면 된다는 간단하지만 특별한 방법을 보여 주었다. 그가 바뀔 수 없다면 내가 바뀌면 되는 거였다.  

바뀌면 되는 거다. 우리 스스로 다문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지 말고 어떤 이유로 우리 이웃이 됐다면 그냥 이웃인 거다. 그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게 낯설다면 우리부터 생각을 바꾸고 선입견을 없애면 되는 거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우러지면 되는 거였다. 고기오를 받아들인 닭들처럼 말이다.

  

 

벼랑에서 날기 연습하는 닭들

고기오와 그 동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닭을 닭이게 하는 건 무엇일까? 질문을 던진 작가처럼 나를 나답게 하는 건 뭘까? 궁금하다. 자꾸만 네 편 내 편 가르는 이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면 네 편은 무엇이고 내 편은 누구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인트로만 중요한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