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하는 책 여행자'의 가을 책거리

-책을 삶 속으로 2 '제주어 마음 사전' '현택훈' 작가와의 만남-

by 가시나물

일요일 아침마다 낭독을 하다 보니 벌써 읽은 책이 열 권은 족히 되는 듯하다. 평일이라면 어림도 없는 민낯에 가장 편안한 옷을 입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어떤 날은 인스턴트커피도 좋고, 언젠가는 갓 내린 커피도 개이치 않고, 가끔은 커피숍에서 사 온 아메리카노의 사치도 부려가면서 그녀들만의 낭독을 했었다.

차츰 책이 쌓이고 낭독을 마치다 보니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함께 하는 자리를 가질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낭독했던 책 중에 '제주어 마음 사전'의 작가 현택훈 시인을 모시고 작지만 우리들만의 '가을 책거리'를 하게 되었다.

장소마저도 가을가을 했던, 광령리의 조그만 공간. 살림집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인형극단을 하고 있는 그곳은 가난한 연극인들의 소중한 보금자리 같은 곳이었고 어느 연극배우의 낭만이 깃들어 있을 것 같은 곳이었고, 아이들의 환호성과 웃음이 가득했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낡은 듯했지만 정감이 흐르고 인형들과 극단 소품들이 반기고 사과 상자를 곱게 칠해서 책꽂이로 쓰는 그곳은 한창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우리 시대의 소극장 그대로였다. 그곳에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힘을 보태 만든 플래카드와 책과 어설픈 동영상과 맛난 샌드위치가 곁들여졌다.

행사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어느샌가 우리 회원들 틈에 끼여 있던 시인. '나 왔습니다'도 '언제 시작하나요?'도 없는 그냥 원래 우리 회원인 듯 부산스러운 준비 틈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시인. 마이크가 안 되니 시인과 초대 손님이 함께 마이크를 손보고, 장소를 못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으니 위치를 설명하는데 사공들도 많고, 참견러도 많은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그렇게 큰 격식 없이 자연스레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듯 따듯한 아랫목에서 고주알미주알 수다를 떠는 자매들처럼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 처음은 나와 회원 한 분의 낭독이었다. 그동안 책 내용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곰세기(돌고래)를 낭독했다. 제주도를 돌고 도는 돌고래가 해녀들을 만났을 때 해녀들이 그들을 향해 "배알로(배 아래로), 배알로(배 아래로)"라고 하면 돌고래들이 알았다는 듯 해녀들 밑으로 헤엄을 치며 지나간다는 이야기. 문제를 해결할 때 그렇게 아래로 낮은 자세를 해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시인의 말이 들어있는 내용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에코가 되어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 앞에서 책을 낭독한다는 것이 이렇게 설레고 떨리는 일이었던가. 십여 명의 분들을 초대해 놓고 낭독하는 것인데도 백 명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은근히 근사한 떨림이 일었다. 더구나 그 시간은 농익어 가는 가을밤 아니었던가. 마치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몸을 맡긴 가수처럼 그것도 원작자 앞에서 낭독을 한다는 것은 작곡가 앞에서 가수가 노래를 해야 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혹여 띄어 읽기를 잘못해서 내용이 어그러지면 어쩌지? 발음을 틀리게 해서 내용이 달라지면 어쩌지 하는 기우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들의 가을 책거리 낭독회 및 작가와의 만남은 시인의 이야기로 점점 무르익었다. '시를 쓰게 된 이유', '제주어 마음 사전을 쓰며 있었던 일', '살아가며 겪었던 이야기들'이 툭툭 던지는 농담과 문제 내기로 흥을 돋웠다.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동년배인데도 이렇게 경험치가 다르고 사고의 깊이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 출발이 결핍과 우울과 슬픔과 아픔이 될 수도 있겠구나 했다. 제주도의 언어, 제주도에서의 삶, 제주도의 사람들로 이야기가 꽉 들어찰 무렵 시인의 돌발 퀴즈가 시작되었다. 시인의 첫 시집부터 수필집 등이 상품으로 나왔는데 기를 쓰고 받아보겠다고 열을 냈지만 결국 내 손에 남은 건 원고지였다. 시인의 싸인도 없고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원고지. 모* ***표 예쁜 원고지. 다들 그 원고지에 글을 쓰라는 뜻이라며 웃었는데 나만 기분 좋게 조금 슬펐다.

시인의 투박하지만 솔직한 이야기와 우리 회원들의 낭독으로 행사는 더 풍성해졌다. 다들 밖에서는 점잖을 빼는 분들이고 일하는데 정신이 없었을 텐데 작은 수필집 하나 들고 앞에 나가 최선을 다해 읽은 모습이 감동이었다.

가을밤, 시내에서 좀 동떨어진 한적한 곳의 가을은 칠흑 같다는 표현이 느껴질 정도로 깜깜하고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 적막함을 책 목소리로 채운다는 것은 더없이 멋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좋은 사람들과 좋은 책을 나눈다는 것은 너무도 행복한 일이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고 시인을 더 붙잡아두고 싶고, 낭독을 더 하고 싶었지만 두 시간 만에 다들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아쉬웠다.

그곳에 가을 그 시간에 우리들의 책이 있었고, 우리들의 목소리를 따라 흘러가는 또 책이 있었고, 책 뒤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다.

'낭독하는 책 여행자들의 가을 책거리'는 그렇게 불을 지피다가 잿빛 재가 되었지만 재 속에 남아있는 온기는 한동안 나를 따뜻하게 덥혀 줄 것 같다.

이전 10화낭독하는 책 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