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캐와 부캐 사이-
요즘 한국은 부캐 열풍이다. 개그우먼 김신영이 '다비 이모'를 시작으로 유재석의 '지미유', 이효리의 '천옥' 등등. 부캐는 지금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시원스레 벗어던짐으로써 자유로움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는 새로움을 연예인에게도 숨겨왔던 끼를 혹은 원래 자신의 모습(?)을 발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유재석도 평소 단정하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기획사의 깐깐한 사장으로의 부캐를 멋들어지게 소화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딸이자 누나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강사의 역할을 맡고 있는 나만의 부캐는 무엇일까? 아니, 부캐를 만든다면 어떤 것이 좋으려나 즐거운 상상 중이다.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 앞에서 뭔가 하는 것을 좋아하니 무대에서 마음껏 나를 불태울 가수는 어떨까? 그게 아니면 좌절에 허우적대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아 눈물과 회한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배우가 괜찮을까? 아님, 필명을 근사하게 바꾼 베스트셀러 작가? 생각만 해도 전기가 찌릿찌릿하는 아찔한 순간이다.
맘 속엔 이런 열망이 있는데 왜 그동안 도전 한 번 해보지 않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렇게 살았을까? 아마 가수나 배우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외모부터 끼와 능력이 안 되니 미리 포기했을 것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한 꿈도 영혼을 불살라야 하는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함을 알기에 시작도 안 했을 터이지만 이제서야 부캐 운운하며 잊어버렸던 옛 꿈을 들춰내며 혼자 낄낄거리고 있다.
이젠 세상이 점점 단일, 단순은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다. 직업도 하나여서는 삶을 유지하기가 버겁고, 단순 고지식한 성격은 점점 매력을 잃어가는 것 같고, 의자도 의자라는 기능 하나만으론 팔리지도 않는다. 뭔가 덤이 있어야 하고 개성이 있어야 하고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숨은 비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책 쓰는 의사', '연주가이자 작곡가', '가수이자 영화배우' 뭐 이쯤은 돼줘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 지금의 이 세상은 너무도 다채롭고 풍요스러운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쫓으래야 쫓을 수 없는 막막 강산 이기도 하다. 나처럼 부캐에 또 다른 열정을 쏟아부을 수 없는 사람은 지금 본캐를 채우기도 부족하니 지금의 세상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듯도 하다.
하지만 단순, 단일, 본캐여도 좋지 않을까? 우직하게 자신의 길만을 걸어온 사람들의 삶에 더 깊이가 있고, 된장이나 고추장 같은 슬로 푸드는 본캐에 충실하기에 더 건강한 맛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다른 것만 찾으려 든다면 시간이 흘러 우리가 처음 좋아하던 그 맛과 그 색깔은 사라지고 변형된 다른 모습만 마주치게 될 것이다. 유재석의 이효리의 '부캐'가 지금 사랑받고 있지만 그건 그들의 본캐를 인정하고 좋아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깔려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 무작정 새로운 부캐로의 변신만을 원하는 것은 아닐 거라 짐작해 본다.
너도 나도 '부캐'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본캐에 충실하면서 '부캐'를 만드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나 지금 뭐라 하고 있지?) 결국 난 본캐에 충실해도 좋고 색다른 반전 매력을 선보이는 '부캐'도 좋다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이러 내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니 우리 아버지는 공무원이라는 본캐와 주말 농사꾼이라는 부캐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 엄마는 주부라는 본캐와 농사꾼이라는 부캐를 가지고 있었다. 동생 역시 피자집 사장이라는 본캐와 우쿨렐레 강사라는 부캐를 가지고 있다. 우리 남편은 그냥 은행원이라는 본캐에 충실하다. 난 어떨까? 나도 독서글쓰기 강사면서 한국어 강사니까 본캐와 부캐가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님 브런치에서 글쓰기 하고 있으니까 부캐가 있다고 해야 하나? 여러 일을 하고 있으나 그 어느 하나 자신이 없으니까 본캐다 부캐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본캐와 부캐에 대한 나만의 횡설수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