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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May 29. 2020

알리의 사랑의 빵

좌충우돌 한국어 교실 속 작은 세상1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이 온다는 소문에 학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국어 강사가 된 지 겨우 이 년째 되던 그때. 이제 갓 한국어 가르치기를 시작한 햇병아리 선생인 내가  번도 만나본 적 없던 우즈벡 학생들을 생각하니 은근 긴장이 됐다. 의사소통은 어떻게 할거며 통역은 누가 해 줄지.  큰 우즈벡 학생들이 키 작은 나를 만나면 어떨지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엔 키가 크고 눈이 큰 우즈벡  학생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밭일 하는 김태희'가 있다는 미녀의 나라, 여학생은 극히 드물었지만 깊고 그윽한 눈을 가진 남학생들도 정말 미남들이 많았다. 그들은 외모부터 우리와 조금 달랐다. 지극히  동양적인 외모가 있는가하면 유럽인들처럼 하얀 피부에 큰 키, 오똑한 코를 한 이들도 많았다. '알리셰르','분여드','쇼흐르크' ,'파여즈'  등 낯선 발음과 자모음의 합성은 외우기도 쉽지 않았다. 동서양이 공존하는 나라, 굽힐줄 모르는 개척 정신이 강한 사람들. 자기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한 학생들. 그들은 거친듯 하면서도 예의가 바른 신사들이었고, 수줍은 듯하면서도 당차고 거침이 없었다. 특히 웃어른에게 공손했으며 선생님들께 깍듯했다. 내가 자꾸만 이름을 틀리게 부르고 학생들의 이름을 바꿔 불러도 '선생님, 괜찮아요'하며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다. 다행히 이미 한국어를 공부하고 온 학생들도 있어서 걱정과는 달리 우즈벡, 베트남, 중국, 몽골 학생들이 모인 교실 안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가끔 너무 빤히 얼굴을 쳐다보고 있거나 교실 안에서 큰소리로 자기네끼리 모국어로 대화를 하는 통에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학생들은 수업에 무척 적극적이어서 질문도 많고 한국어 말하기 활동에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알리셰르는 우즈벡 학생 중에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서양인의 얼굴과 동양의 기질이 섞인 다혈질 학생이었다. 흥도 많아서 우즈벡 가수가 학교를 찾았을 땐 무대로 나가  춤을 추기도 했고 성산일출봉에 올랐을 땐 우즈벡 국기를 망토처럼 휘두르고 자랑스러워했다. 웃음도 많았고 목소리도 크고 화도 잘냈다. 특히 자존심을 건드는 일은 참지를 못했다.  다른 나라 학생들이 실수를 하거나 발음이 틀리면 자기는 큰소리로 웃더니 정작 본인의 실수에 다른 학생들이 웃기라도 하면 조금도 참지 못하고 매섭게 노려보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급변한 교실 분위기에 초보 강사였던 나도  당황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잠깐 헤맸지만 이런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나에게 주어진 의무였기에 눈 딱 감고 기선제압에 들어갔다. 속으론 두근두근 거렸지만 나보다 머리 한 뼘은 큰 제자에게 눈을 부릅 뜨며 가능한 한 쉬운 단어로 나의 생각을 설명했다. "수업은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실수할 수 있고 웃을 수 있어요.  하지만 친구한테 화 내는건 안 돼요" 짧은 문장의 이야기를 아주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너의 잘못을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는 의지도 섞어 알리를 쏘아봤다. 내 등 뒤로 베트남,몽골, 중국 학생들의 눈빛이 쏟아졌다. 이 녀석이 덤비거나 나가버리면 어떡하지?하는 불안함도 있었다. 내가 모르는우즈벡 말로 따따부따 떠들어대면 어떻게 하지? 짧은 정적에 공기까지 얼어붙었지만 나름의 단호함(?) 때문이었는지 웃어른에 대한 공경을 중시하는 그네들의 문화 때문이었는지 알리는 "선생님 죄송합니다"하며 여러 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사과했다. 모든 걸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였지만 알리는 수업 시간의 제 실수를 인정했고 수업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리의 태도가 삽시간에 확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선생님 앞에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을 줄도 알고 뭔가 진진한 표정으로  자기의 생각을 설명하는 알리를 보면 배시시 자꾸 웃음이 난다. 

 알리는 요리도 잘했다. 어느 날, 한국어가 서툰 알리가 나에게 "선생님, 빵을 만들었어요" 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맛있어요? " "네, 아주 맛있어요" 알리는 자신만만해했다. 그리고 뭔가 더 할 말이 있는듯 표정과 손짓으로 나에게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오라는 손짓도 같고, 다시 온다는 이야기도 같은 알리의 수화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알리와 나의 수수께끼가 시작되었다. "뭐? 온다고요?" "오라고?" "다시 학교에 온다고?"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하는  보니 아까부터 화가 나는 건 같은데 뭔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라는 표정이다. 결국 다른 선생님까지 이 게임에 합류를 했고 결론은 알리가 그 날 기숙사에서 빵을 만들기로 했는데 같이 기숙사에 가면 빵을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자 기숙사에 여자는 못 간다고 했더니 그럼 내일 빵을 가지고 와서 선생님께 선물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마음은 고맙지만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알리는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알리는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왔다. 그리고 봉지 속에서는 크리넥스 티슈가 한 장 덮힌 동그란 빵이 들어 있었다. "선생님, 여기 보세요. 맛있어요." 금방 만들었는지 따끈따끈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큰 빵 안엔 또박또박 글씨가 씌여 있었다. 감동을 하려는 찰나, 빵에 쓰인 글씨를 보는 순간 정말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 빵 안에는 '사랑해 아주'라고 적힌 글씨가 먹음직스럽게 보였는데 그만 'ㄹ'이 꾸로 새겨져 있었다. 저 투박한 손으로 빵을 만들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한국어로 한 글자 한 글자 글씨를 만들려고 애쓴 모습이 상상돼서 너무 기특했다. 나는 몇 번이나 감동했다고, 고맙다고를 연발했다. 알리는 나 만큼이나 기뻐하며 다음에 또 만들어 오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따뜻하고 담백했던 그 빵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알리가 선물한 우즈벡 빵이다-사랑해, 아주

 한 번은 알리가 내 몸 치수를 재겠다고 줄자를 가지고 왔다. 나는 가슴을 엑스자로 막으며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우즈벡 옷을 만들어 선물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옷은 우즈벡에 있는 엄마와 누나가 만들거라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너무 부담되니까 안 만들어도 된다고 했지만 우리나라 김보성(?) 같은 고집을 가진 그 녀석은 끝내 내 치수가 궁금한 모양인지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한국 여자 옷치수를 찾아보라며 '66'임을 밝혀야 했다. 안 그랬다간 또 몇 날 며칠 녀석의 집요한 질문을 견뎌내야 했을 것이다. 설마 진짜 옷을 만들어 오겠느냐고 잊어버리고 있던 어느 날, 알리가 한국에 온 지 1년이 다 될 때쯤이었던거 같다. 갑자기 알리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원피스와 외투를 펼쳐 보였다. 그동안 알리는 다른 선생님의 반이었고, 잘 만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알리의 선물은 또 내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감동이었다.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녀석의 신념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동안의 '꼴통 알리'를 잊게 만들었다. 알리의 집요함은 거기서가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어머니가 궁금해 하신다며 사진을 보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비타민제를 사서 사진과 함께 보내 드렸다. 우즈벡 원피스를 입은 내 모습을 알리는 무척 흡족해 했다. 가끔 다른 우즈벡 학생들을 만났는데 "선생님, 우즈벡 사람 같아요, 예뻐요"하며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아마 인스타**이나 페이스*  같은 곳에 우즈벡 전통의상을 입은 내 사진을 올린 모양이다. 지금도 알리는 가끔 문자를 보낼 때 '어머니처럼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허걱, 이제는 어머니 소리를 들어야 할 때구나하면서 왠지 섭섭했지만 그네들의 문화를 생각하면 내 나이는 할머니에 가까워가는 나이인 것도 맞다. 나는 '네, 아들'이라고 대답해 준다. 그러면 알리는 '어머니, 사랑해요'한다.  학교에서 알리는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 행정실 선생님들은 아주 골치가 아프다고 했고, 다른 선생님들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어 첫 선생님'이어서 그런지 내 앞에선 정말 순하고 어린 양이다. 그래서 나는 농담조로 한국어 유학생 어린이 알리에겐 내가 너무 어려웠었나 보다 라고 한다. 가끔 나도 알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국은 이래야 한다고 하면 "선생님, 섭섭해요"하며 얼굴을 찡그린다. 왜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냐는 얘기다. 또 섭섭하다는 표현은 어디서 배웠는지 아주 아무 때나 잘 써 먹는다.

 지난 겨울 알리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나는 학교 밖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게 부담도 되고 해서 몇 번을 거절했다. 마침 기침을 하며 감기에도 걸렸던 터라 핑계도 좋았는데 알리는 선생님의 감기를 낫게 해 줄 음식을 준비했다며 전화로, 문자로, 나를 못살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알리가 정성스레 만든 생일 상 옆에서 생일축하를 하고 있었다. 알리가 말한 나를 위한 음식은 '양고기 스프'였다. 마치 한국의 김치찌개 같았는데 알리의 정성이 녹아 있어 그런지 따뜻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든 생일 음식들이다. 우즈벡 식 만두, 스프, 빵을 만들어서 생일을 축하했다.

한국어 강사를 한 지 이년차라서 나도 햇병아리 강사지만 알리 역시 타국에 온 우즈벡 햇병아리여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설명이 이해가 잘 안 돼도 "알겠어요, 선생님"하는 알리가 고마운 때도 많았다. 한국어를 못한다고 어린아이가 아닌데도 나는 알리가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애 같다. 그래서 이것도 도와줘야 할 것 같고 저것도 알려 줘야 할 것 같고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란 걸 안다. 알아서 아르바이트도 구하고 알아서 여행도 다니고 더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말이다.  

 이제 알리와도 헤어질 때가 됐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알리도 대학교로 진학할 듯하고 제주를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 일년 동안 알리와 나눴던 마음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언어는 문화이자 사랑이다. 그리고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지만 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말로 서로의 생각을 완벽하게 전할 순 없지만 불멸의 진리인 공경과 사랑은 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음식이 낯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까지 와서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알리를 응원해 주고 싶다. 의리 하나로 똘똘 뭉친 알리, 휴대폰도 바꾸길 여러 번,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기도 몇 번, 이젠 고물차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과속 딱지를 떼는 그 녀석을 말이다. 지금도 만날 때마다 나는 정신 못차렸다고 잔소리를 하고 그네는 "아니에요 선생님~"하며 도망치지만 몇 년 후 나의 한국어 강사 시절을 되돌아 볼때 알리와의 일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어줄 것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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