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시나물 Jun 03. 2020

당신!!, 당신~~, 당신?

-좌충우돌 한국어 수업  속 작은 세상 2-

 한국어의 '당신'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억양과 말투에 따라 정말 너무도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의 'you'를 해석하면 '당신'이니 외국 사람들은 '당신'이란 말이 그저 '너' 대신 상대방을 높이는 것쯤으로 알기 십상이다.

 우리나라의 높임말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가르치기 전엔 나도 미처 몰랐었다. '나이'의 높임말은 '연세'고, '집'의 높임말은 '댁'이고 '밥'은 '진지'고...... 이렇게 단어 자체가 높임말이 되는 경우는 학생들도 나도 쉽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 나를 낮춤으로써 높임이 되고, 듣는 이를 높이거나 상대방의 몸이나 물건을 높임으로써 존대가 되니 그야말로 학생들은 멘붕도 이런 멘붕이 없다. 그중 가장 속 썩이는 단어가 바로 이 '당신'이다.

 우즈베크 학생들이 처음 한국어를 공부할 때엔 원체 장난기가 많은 내 질문 때문에 당황해하거나 우물쭈물한 적이 많았다. 주로 내 질문은 "우리 학교에서 누가 제일 예뻐요?", "우리 학교 선생님 중에서 누가 제일 친절해요?" "누가 가장 좋아요?" 이미 정해진 답이 뻔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다른 데를 보며 모른 척 딴청을 핀다.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계속 재촉하는 나에게 우는 아이 젖 주는 냥으로 대부분 "선생님이요" 아니면 "장선생님요'하는데 꼭 몇 명은 "당신이요"라고 대답한다.

'당신? 당~~~신~~~~?'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찡그려지고 눈이 땡그래 진다. "당신이 제일 예뻐요." "당신이 정말 친절해요" "당신이 진짜 좋아요"

한국어 초급반이니 '당신'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듣는 나로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 '당신'이 주는 울림에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거기다 손가락질까지 하면 이건 뭐지? 하는 당혹스러움도 함께 따라온다.  '당신'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닌데도 학생이 선생한테, 나이 어린 녀석이 서른이나 많은 나에게 어떻게 감히 하는 마음이 앞선다. 당황해하는 나를 보는 학생들도 이상하게 생각한다.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순진한 표정이다. 오히려 나는 '당신'이 좋다고 했을 뿐인데 왜 선생님의 얼굴은 저렇지? 하는 정도다. 일단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당신'은 어울리지 않아요."라고 이야기하고,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묘수를 준비해야 했다. 애써 여러 예를 설명하는 나를 보며 학생들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린다. 그중에서도 '부부' 사이에 '여보', '당신'이라고 부른다는 얘기엔 다들 신기한 눈치다. 그 뒤로도 학생들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에요. 당신은 높임말이에요"하며 가끔 나를 놀린다. 그래, 의미를 알고 농담까지 한다면야 한국어가 늘었다 봐 줄 생각이다.  

 조금 급수가 올라가면 학생들은 '당신'의 의미를 잘 이해한다. 당신이 '너'의 높임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당신은 부부 사이에서 부르는 다정한 호칭이 될 수도 있고, 삿대질하며 싸울 때의 '당신'은 상대를 폄하하는 것으로 예의가 없는 말이 되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이름 대신 '당신말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 앞에서 이미 언급한 사람을 높여 말할 때 '할아버지 당신께서는......'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똑같은 단어인데 상황에 따라 뜻이 달라지고 전달하려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이걸 편하다고 해야 할지 불편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요즘 코로나 19에 대한 브리핑을 할 때마다 부지런히 손과 입을 움직이는 수화 통역사들을 볼 수 있다. 급박하게 변하는 상황과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이들은 가능한 무늬가 많거나 밝은 옷은 피하고 있다고 말한다. 수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칙한(?) 상상을 해 본다. 그들에게 이 '당신'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존재한다.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이상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말의 깊이와 색깔과 분위기를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 외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산 외국인이 한국인 뺨치게 말을 잘 해내도 한국의 풍토와 문화와 한국 DNA를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같은 땅에 살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한국인들의 기질까지도 언어엔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안부 인사로 말하는 '보고 싶어요, 선생님'이나 '사랑해요 선생님'에 살짝 설레다가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들은 '보고 싶다'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그리움의 색깔과 깊이가 있는지 모른다.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까지인지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하루 이틀 못 만나도 '보고 싶다',  '잘 지냈어요?' 대신에 '보고 싶다'다.

 하지만 한국말이 서툰 그들을 보면서 말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생각한다. 오히려 떠듬떠듬 대는 그들의 한국어에 더 깊은 정이 가고 마음이 간다. 청산유수 같은 정치인의 거짓말보다는 얼마나 듣기가 좋은지. 사람 사이엔 말의 깊이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서로의 마음이 통하기만 해도 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학생들과 나에게 필요한 것은 후자일 터이다.

 나에게 '당신~~~~'은 교생실습 때 만났던 미술 선생님이었다가, 서울에서 잠깐 내려와 만났던 그 누구이기도 했고 지금 내 곁에 있는 남편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나에게 '당신!!'은 약속을 내팽게치거나 모른 척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겠고 마지막으로 '당신?'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내 적인지 아군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지인이 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당신'을 만나고 '당신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당신'이 어떤 '당신'이 되고 어떤 역할을 할지는 나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는 점이다. 내가 먼저 그들에게 어떤 '당신'이 될지를 생각한다면 '당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나도 그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내 당신'이 되고 싶고 둘도 셋도 없는 누군가의 '당신'으로 남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리의 사랑의 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