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돈 오만동을 받았다-
베트남 다낭을 가보기로 했다. 처음엔 가깝다는 이유로 골랐던 나라지만 점점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의 나라가 어떤지 궁금했다. 이름을 부를 때도 어느 것이 성이고(응우옌), 어느 것이 이름(빈, 황, 한, 완, 히에우 등등)인지 몰라 쩔쩔매는 나에게 괜찮다며 웃으며 다가와 준 학생들이 너무 예뻐서 이번 여름휴가는 '베트남' 너로 정한 것이다.
한국어를 가르칠 땐 초급이 제일 어렵다. 낯선 한국 알파벳을 가르치고 음가를 알려 주고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교실 용어를 가르쳐 수업이 별 무리 없이 진행되게 해야 했다. 초보 강사에다 초급을 맡았으니 잠이 오질 않았다. 그림을 복사해 교실 앞에 붙이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교실로 들어섰다.
학기가 시작될 때 온 학생들이 아니라서 우리 반은 '특별반'이었다. 15명의 베트남 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 조교 선생님과 어리바리 긴장된 내가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웃으며 교실 안을 들어선 순가, 갑자기 학생들이 모두 동시에 발딱 일어서서 나를 향해 섰다. 깜짝 놀란 내가 조교 선생님께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베트남 학교에선 선생님께 이렇게 예의를 표하는 거라며 조교 선생님이 웃으셨다. 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났다.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하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학생들이 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까 귀를 쫑긋 거리고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하고 난 후 나는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여러 가지 교실 용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인사와 나의 이름까지 전했다. 다행히 학생들도 베트남에서 자음과 모음을 이미 공부하고 왔던 터라 의외로 조금 수월했다. 학생들은 몇 시간도 안 돼 모음과 자음을 조합하여 글자를 읽었고, 그림 카드를 통해 단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내가 웃음이 조금 많은 편이라 교실 안은 까르르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학생들 이름을 틀려도 까르르, 한국어를 베트남 말로 가르쳐 달라고 해서 내가 발음하면 까르르, 말이 정확히 통하진 않았지만 몇 마디 안 되는 단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 신기해서 까르르까르르. 교재 진도를 나가야 했지만 한국 사람, 한국어, 한국 문화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ㄹ'을 'r'발음처럼 하기도 했고, 억양이 오르락 내리락도 했지만 다들 선생님과 CD에서 나오는 한국어를 열심히 따라 했다. 숙제를 내도 얼마나 예쁜 글씨로 써 오는지 감동 감동이었다. 제주 생활에 긴장을 하고 있을 터라 몸도 뻣뻣하고 불안함에 이래저래 눈칫밥만 늘어갈 텐데도 학생들은 씩씩했다. 학생들이 너무 예뻤다. 3주간 나와 만나 수업을 하고 나머지 2주는 다른 선생님이 맡기로 하고 수업을 마무리했다. 헤어지고 난 후 다른 선생님에게 이 특별반을 또 맡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씨가 된 것인지 그다음 학기에 정식으로 아이들은 내 반, 우리 반이 되었다. 학생들과 내가 다시 만난 날, 헤어진 2주 동안 잘 지내고 있었냐며 서로 안부를 물었다. 아이들과 다시 만난 날, 부끄러움도 가득했고, 들뜬 분위기가 역력했다. 득은 더 장난꾸러기가 되었고, 끼에우는 너무 예뻐졌고, 한과 완은 그 새 커플이 되어 있었고, 황은 점점 피부가 뽀애졌다.
이렇게 한 학기 동안 우리 반엔 일본 여학생 두 명과 몽골 남학생 두 명, 중국 여학생 한 명이 더 들어왔다. 물론 중간에 탈락한 학생들이 있었으니 우리 반은 열 다섯 명을 계속 유지한 것 같다. 그동안 베트남 '스승의 날'이라고 케이크도 잘랐고, 윷놀이 꼴등한 우리 반을 격려하기 위해 피자 파티도 했고, 문화체험으로 제주도 이곳저곳을 다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꿈같은 나날이었던 거 같다) 난 매일매일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신기했고, 잘 통하는 우리 반과 정말 즐겁게 수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 학생들에 대한 정이 더 깊어졌던 거 같다.
다시 학기가 지나 조금 상급반을 담당하게 됐을 때 문제의 베트남 '다당' 여행을 가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과 여행 얘기를 주고받다가 이번 방학에 베트남 간다고 했더니 학생들은 베트남 여기가 좋아요 저기가 좋아요 하며 자기 고향 자랑에 한참을 들떠했다. 그리고 한 여학생이 다음 날 베트남 돈을 준비하고 왔다. 눈이 동그래진 나를 보고 그 학생은 베트남에서도 한국에서처럼 용돈이나 선물로 돈을 준다는 것이었다. 어렵게 한국에 와서 아르바이트 해 가며 수업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난 아니라고 극구 거절했다. 괜찮다고 선생님 돈 많으니까 잘 갔다 오겠다고. 그런데 그 학생은 웃으며 자기가 베트남으로 돌아가려면 앞으로도 5년은 더 있어야 한다며 많은 돈이 아니니 걱정 말라며 내 손에 쥐어주었다. 베트남 돈 오만동. 한국 돈으로 2500원. 이 돈으로 분짜 두 그릇을 먹을 수 있는데 분짜는 오바마도 맛있게 먹었으니 가서 꼭 먹어보라고 맛있다며 웃었다.
그렇게 베트남을 갔고, 더위와 맞서며 맛난 음식에 취하고 과일에 흠뻑 젖으며 여행을 즐겼다. 배도 타고, 케이블카도 타고, 씨클로도 탔다. 기념품도 사고, 군것질을 했지만 그 학생이 준 베트남 돈은 그대로 지갑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쓸 수가 없었다. 그 녀석이 준 것은 돈이 아니라 마음이었기에 그 마음을 보낼 수가 없었다. 지인들에게 자랑, 자랑만 실컷 했다. 그리고 뿌듯했다. 이런 학생의 선생님이라는 것이 너무 좋았다. 베트남을 갔다 와서 다시 만난 학생들에게 더워서 죽을 뻔했다는 내 말에 아이들이 깔깔 댔다. 케이블 카를 타고 오르다가 전기가 끊겨서 너무 무서웠다는 말에 놀라는 사람은 모두 한국 사람이라면서 자주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음식은 입에 맞았는지, 어디를 갔다 왔는지 궁금해했다. 여행을 했다는 것도 좋았지만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의 고향을 다녀왔다는 것이 뿌듯했다.
지금 그 학생들은 거의 대학생이 되었고, 결혼한 학생도 있고, 아르바이트 중이니 한 번 들르라 하는 학생들도 있다. 코로나 때문에 위험하니 당분간 오지 말라는 걱정도 들었다. 물론 연락이 끊긴 학생들도 많다. 너무 안타깝다. 하지만 2019년 여름은 나의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아이들과 다시 기쁘게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