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유학생에서 어엿한 아빠가-
스승의 날이다. 귓가에서 '선생님, 선생님'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주위엔 아무도 없다. 이젠 출강하는 학교도 없고, 띄엄띄엄 나가니 스승의 날과 맞지도 않고, 줌으로 수업하는 녀석들한테 축하한다는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예전에는 정기적으로 나가는 학교가 있으니 그동안의 시간과 정이 굳어 매번 스승의 날이면 편지도 받고 조그만 선물도 받고 했었는데 지금은 학생과 교사가 서로 마음을 나누기엔 뭔가 어색하고, 뭔가 하려 하면 잘못된 일을 하는 것 같은, 다가서려고 하다가도 주춤하게 되는 사회, 학생과 스승이 맘껏 축하해 줄 수도 축하를 받을 수도 없는, 스승의 날이 죄스럽게 여겨지도록 법제화한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얼마 전 난데없이 페이스북 메신저로 어린아이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유난히 큰 눈에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내가 삼 년 전 가르친 베트남 학생의 소식이었다. 그런데 아기 사진은 뭐지? 이제 이십 대 초반인 걸로 알고 있고, 어학당을 마치고 코로나다 뭐다 해서 연락이 끊어졌었는데 갑자기 사진 한 장에 설마설마하면서 진짜 진짜 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유독 첫 만남부터 귀여운 외모에 장난기가 많고 '선생님, 선생님'하며 잘 따랐던 뚜안이 아빠가 됐다며 잘 지내시느냐 보내온 안부 문자였다. 초급반 수업을 할 때 명함 만들기를 했었는데 뚜안의 꿈은 '한국어 교수'였다. 그래서 내가 '교수님', '교수님'하며 부르곤 했었는데 어느 날, 비밀이 있다며 우리 반 여학생과 사귀는 중이라고 고백을 하는 거였다. 진짜? 놀라는 나를 보며 절대 비밀이라고 그렇게 다짐을 받았었는데 결국 둘이 이렇게 됐구나 했다. 가끔 몰래 페이스 북에 있는 사진을 보면 친구들과 축구를 하기도 하고, 허세 가득한 (?) 포즈에 여전하구나 싶어 혼자서 빙긋 웃곤 했는데 결국 이렇게 사고(?)를 쳤구나 싶었다.
삼 년 전 11월이었다. 수업을 시작하려고 교실 문을 연 순간, 학생들이 '와'하며 갑자기 교실 안이 깜깜해졌다. 그리고 뚜안이 초에 불을 붙인 케이크와 꽃을 준비해서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앉아 있던 학생들도 웃으며 "선생님, 축하합니다"하며 같이 불을 꺼야 한다고 성화였다. 이제 막 걸음마 한국어니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었다. 세계 공통 축하의 노래인 생일 축하 노래를 대신하며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 내 생일도 아니고, 무슨 기념일도 아니어서 도대체 오늘이 무슨 날이냐며 아이들 얼굴을 쳐다봤다. 그날은 11월 20일, 베트남 스승의 날이었다. 우리 반은 두 명의 강사가 가르치고 있으니 어제는 미리 했고, 그 케이크를 그대로 가지고 오늘 재탕하는 거였다. 재탕이면 어쩌고 삼탕이면 어쩌랴. 가난한 유학생들의 마음이 담긴 케이크와 그들의 얼굴은 억만금의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그렇게 수업 한 시간 땡치고 학생들과 한국의 스승의 날 풍경, 베트남 스승의 날 이야기를 풀어가며 소박한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다.
유독 우리 반이 단합이 잘 되고 베트남, 몽골, 일본, 중국(한 명뿐이었지만) 학생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래서 문화 이야기를 할 때면 이야기가 너무도 다양하고 풍성했고 서로 다른 문화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학생들은 두 명의 선생님을 많이(나름 공평하게) 사랑해 주었다. 물론 한 분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예쁘고 젊은 선생님이었으니 나하곤 비교도 안 됐지만 나는 엄마였고, 그녀는 누나 겸 언니였을 것이다.
학기가 끝나서 수료식 하는 날,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 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을 때 여기저기 한 명씩 나타나는 폼들이 가관이었다. 평소 그렇게 말이 없던 몽골 학생의 눈이 뻘겋고, 퉁퉁 부은 눈의 베트남 학생들 하며 수줍게 나타난 일본 여학생들, 너무도 당당했던 중국 여학생이 느릿느릿 여기저기서 한 명씩 모습을 보였다. 내가 눈을 크게 뜨며 지금 몇 시냐고 면박을 주려고 하는데 우리 반 반장이 슬며시 팔짱을 끼며 속삭이길, 어제 학생들끼리 기숙사에서 종강파티를 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몽골 학생이 얼마나 술을 잘 마시고 말이 많은지 아냐며 너무도 놀랐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반 학생들 모두 눈의 초점이 없는 것처럼 비실비실이었다. 아마 학기중에 벼르고 별러서 자기들끼리 시간 맞추고 장소 정하고 음식 마련하고 파티를 한 거니 얼마나 즐거웠을까 생각했다. 화를 내려고 하다가도 그 젊음을 이해 못 할 게 아니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소중한 추억을 쌓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어찌 수료식을 마치고 아이들과 사진 찍고 안아주고 인사하며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끝까지 엄마의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그랬던 뚜안이 이젠 어엿한 아빠가 돼서 한국살이를 시작한 거였다. 축하한다고 너무 예쁜 아들이라고 답장을 했다. ('예쁘다'는 남자한테 안 쓰는 표현이라고 베트남 학생이나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이 싫어하지만 난 선생님과 부모님은 남학생들한테도 예쁘다 할 수 있다고 우겼었다.) 그리고 정말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짐을 해 두었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렇게 학생들은 하나 둘 제 갈길을 찾아가고 있다. 타국에서 그 삶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가 가진 끈기와 근성으로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그들은 어엿한 성인으로 자신만의 삶을 옹골지게 가꾸어 나갈 것이다. 그 항해에 어찌 잔잔한 파도만 있겠는가. 그 길에 어찌 따뜻한 햇볕만 내리쬘 수 있겠는가. 더욱이 가는 길이 잘 알지도 못하는 미지의 바다라면 두려움과 어려움은 훨씬 클 터였다. 그 외로운 길에 그들이 가끔 뒤를 돌아보다가 기쁘게 문자를 할 수 있는, 그래서 항상 반가울 수 있는 그런 선생님으로 남고 싶다. 내가 한국인의 표준이 될 수는 없지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좋은 사람만 만나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