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홈쇼핑 마니아다. 홈쇼핑을 알게 된 지 이십 년이 되는 것 같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홈쇼핑이 뭔지도 몰랐는데 결혼하고 나서 내 마음대로 텔레비전을 주무르다 보니 홈쇼핑의 세계로 자연스레 흘러가게 되었다. 내가 접한 홈쇼핑의 세계는 정말 신세계였다. 직접 가지 않고도 간단하게 전화로 주문하고 집에서 택배로 물건을 받고 전화 한 통이면 반품도 콜이고 교환도 마음대로라니. 거기다 택배비도 무료고 몇 번이고 반품을 해도 화를 내거나 싫은 티를 내지 않으니 매장에서 직원들과 실랑이하고 직접 방문하는 번거로움이 없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시스템인지. 거기다 화장품 세트를 3세트나 주면서도 한 세트 값도 하지 않고, 옷 하나를 사도 하나 조금 넘는 가격으로 네 벌, 다섯 벌을 살 수 있고 매번 무슨 무슨 특집으로 카드 할인을 받거나 예쁜 사은품이 등장하고 10% 넘는 적립금을 넣어 준다니 이렇게 착한 소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렇게 신혼 때부터 시작한 홈쇼핑은 나에겐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흥미롭고 신선했다. 언제 물건이 배달될까를 기대하며 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도착한 택배 상자의 테이프를 단칼에 '쫘악'하고 뜯는 '언박싱'의 설렘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 같다. 가끔은 한 통을 다 쓰고 나서 반품을 해도 된다고 하니 이런 세상이 어디있는가. 홈쇼핑의 매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29,900원이라고 하면 너무 싸고, 99.900원이면 십만 원이 안 된다는 생각에 다른 그 어떤 매장보다 가격 경쟁력이 있어서 나같이 싼 값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런 쇼핑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홈쇼핑이 주는 은혜로운(?) 혜택에 힘입어 나는 주구장창 필요하다는 명목 하에 일주일이 멀다 하고 주문을 넣은 것 같다.
홈쇼핑 채널마다 다른 물건을 파는데도 왜 그렇게 필요한 물건이 많이 눈에 띄는지 알 수가 없다. 냉장고를 정리하려면 냉동용 용기가 필요하고 옷을 정리하려면 매직 옷걸이가 꼭 있어야 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려고 하면 예쁜 쓰레기통이 필요했다. 어떤 때는 본 상품보다 사은품이 탐나거나 멋져서 물건을 살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할부'의 그물에 걸려 카드를 꺼내 든 적도 있다. 거기다 살까 말까 고민할 때 '짠'하고 터지는 매진 행렬은 사람 마음을 속절없이 급하게 만들었다. 팔 상품과 어울리는 신나는 음악과 쇼핑호스트의 높아진 목소리는 나도 모르는 새 내 손인데도 내 손 같지 않은 못된(?) 손이 죄의식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낚싯대 끝의 미끼를 대책 없이 물어 제 세상을 버린 물고기처럼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아바타처럼 홀연히 잠에서 깨어 여기저기 황망하게 돌아다니는 몽유병 환자처럼 나는 그렇게 속절없이 홈쇼핑의 헤어 나올 수 없는 블랙홀로 뛰어들었었다.
이렇게 몇 년을 홈쇼핑과 함께 하다 보니 몇몇 쇼핑호스트들의 세련된 멘트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초반에는 정확한 상품 설명과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멘트에 놀랐다면 몇 년이 지난 지금은 홈쇼핑도 마치 토크쇼처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디제이를 불러와 카페처럼 진행을 하기도 하고 겨울이면 화면 가득 눈이 날리며 마치 오늘은 누군가에게 선물하세요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엔 가수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시연하는 코너를 마련하기까지 한다. 또 신뢰를 받는 연예인들의 등장은 그녀를 혹은 그를 믿어 상품을 구매하게 만들었고, 몇 년을 같이 하는 파트너들의 능수능란한 호흡과 진행에 넋을 잃어야 했다. 주거니 받거니 농담을 하며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르는 감탄사와 빵빵 터지는 우스갯소리는 저 물건을 내가 사야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아니 그걸 사야 요즘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요일 몇 시 드라마 제목을 꿰는 것처럼 홈쇼핑도 인기 있는 채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오래된 작가와 독자처럼 그 시간의 마니아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고 보니 1시간 넘는 방송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고 똑같은 물건에 대한 설명에 설명을 반복하고 좋은 점을 몇 번이고 늘어놓는 그런 방송인데도 왜 그렇게 재미가 있는지 어느 사인가 내 혼은 이미 저 세상인 것을 알게 된다.
"검은색 66 사이즈가 품절이라는 것은 짜장면 집에 짜장이 다 떨어진 것과 똑같아요"
"우리는 이제 2,30대를 따라갈 수 없어요. 그들은 젊음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4,50대는 우아하잖아요. 이젠 질로 승부해야 합니다"
"저희 엄마도 이 옷을 사셨는데 키가 작아도 너무 어울리고 좋더라고요"
긴 코트는 옷감이 많이 들어가고, 추위를 막아줄 수 있으며 체형을 보완할 수 있다 장점을 말하고 짧은 옷은 짧은 옷대로 경쾌하고 젊어 보이고 이젠 긴 코트에 질렸다 광고를 한다. 창과 방패의 모순적 설명이다. 그런데도 나는 길면 길어서 사고 짧으면 짧아서 또 좋아라 손뼉을 친다. 하지만 결국 4종 5종이 오면 잘 입는 옷은 많아야 2종이고 키가 크고 늘씬한 쇼핑호스트들에게 어울리는 옷이 키 작고 뚱뚱한 나한텐 어울리지 않음을 느낀다.
이제 모든 집에는 건조기가 들어서고 모든 집에 에어프라이어가 있다. 색깔과 종류는 다르지만 똑같은 물건들이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부엌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옷에 집중했던 나의 쇼핑은 50이 되고 보니 이제는 건강식품에 눈이 간다. 비타민은 필수라 먹어야 하고 혈관을 개선하기 위해 오메가 3도 먹어야 하고, 주름살, 탈모 등을 방지하려니 콜라겐도 있으면 좋겠고, 노안이 오기 시작하니 루테인도 섭취하면 좋겠다. 갱년기가 돼가니 여자에게는 석류가 좋고, 살이 쪄가니 다이어트 식품도 하나쯤 먹으면 좋겠다. 장이 튼튼해야 하니 유산균도 빼놓아선 안 될 것 같다. 전에 먹던 유산균은 이제 변신하기 시작했다. 기능성 유산균이 나와서 다이어트 유산균, 피부를 좋게 해 주는 유산균 등등 그 종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꼭 필요하다고 또 텔레비전 가까이 집중에 집중을 한다. 한동안은 베리류가 인기를 끌더니 요즈음은 노니와 크릴 오일 등등이 인기다.
이렇게 나의 홈쇼핑 경험은 작년 12월 31일까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이젠 좀 홈쇼핑을 끊어야겠다. 홈쇼핑이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싫거나 해서가 아니다. 2인 가족인 나에게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20년 홈쇼핑 경력이니 지금쯤은 옥과 돌을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같은 경우 2인 가족이다 보니 옷이 많아도 물려주거나 같이 입을 사람이 없고, 똑같은 물건을 많이 사놓면 너무 오래 써서 질리기도 하고, 써도 써도 없어지질 않으니 결국엔 누군가에게 나눠주게 된다. 연말 연초에 크리스마스 때 세일을 많이 하니 그 맛에 쇼핑을 했다가 한 번 입지도 않은 채 해를 넘긴 옷이 넘쳐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나 같은 경우는 손해인 것이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홈쇼핑을 좀 끊어보기로 했다. 정말 필요한 것들은 돈을 좀 더 주더라도 낱개로 사고, 미리미리 사지 말고 그때그때 사서 쓸 수 있도록 해야겠다.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계획성 있는 지출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제 홈쇼핑에선 4종이지만 다른 디자인 다른 색깔을 강조하고 싼 값보다는 질 좋은 상품임을 광고한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 당황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이 제품이 한정판임을 상기시킨다. 또! 또! 핸드폰을 찾는다. 하지만 이번엔 참는다. 그리고 도리질을 한다. 나에게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