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전차를 따라간 하루
어제저녁 마신 하이볼 한잔으로 아주 푹 자버렸다.
지금은 술을 종종 즐겨 남들만큼 마실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하이볼 2잔이면 두통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밖을 나와보니 명암이 뚜렷한 풍경이 태양이 얼마나 강렬한지 보여주었다.
그렇다.
지금 이 여행엔 계획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단지 스트레스받는 일상을 떠나고만 싶어 낯선 곳에 온 이유밖에 없었다.
마쓰야마성이라도 가서 사진이라도 남기려고 생각했지만 산사태로 입장이 제한된다고 했다.
다른 갈 곳을 생각해 보니 딱 떠오르지는 않는다.
"인구 50만 명의 소도시에서는 대도시에 비해 이렇다 할 컨텐츠가 정말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난 외국에 오면 거리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관광객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녀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무작정 거리를 걸어보며 사진을 몇 장 찍어보았다.
렌즈 너머로 담긴 거리 풍경은 청초했지만, 현실은 지옥불이라 불러도 될 만큼의 더위였다.
2024년 7월 그즈음 환율은 역대급 엔저였다.
뭐라도 사야 이득일 것 같아 백화점이라도 가보기로 했다.
걸어가기에는 꽤 먼 거리라 교통수단이 필요했는데 찾아본 정보로는 일본의 택시비는 극악무도하다고 했다.
서민의 신분으로서는 감히 택시를 탈 시도조차 못하고, 노면열차를 타보기로 했다.
성인요금 200엔이면 노선 전구간을 가는 것 같았다.
노면전차라니 그 자체로 뭔가 낭만이 있다.
오사카나 후쿠오카처럼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도시와 달리, 이곳에선 좀처럼 한국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 익숙한 말투가 들려올 때가 있었다.
앞에 선 한국인 관광객이 전차를 탔을 때 한국의 시내버스처럼 먼저 요금을 내려고 했다.
일본인 직원은 요금은 내릴 때 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못 알아듣고 계속 지불하려 하자 내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일본은 내릴 때 요금을 내면 됩니다."
"아..."
한국인 특유의 감탄사로 표현하는 '감사합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자리에 앉았다.
(사실 일본 대중교통이 그런 시스템이라는 건 후쿠오카에서 시내버스를 타면서 알게 되었다.)
쇼핑이야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냥 한국에서도 살 수 있는 티셔츠를 좀 더 싼 가격에 구매를 했을 뿐이고, 다 떨어져 가는 즐겨 쓰는 향수도 하나 샀다.
"마쓰야마는 무엇이 유명할라나?"
'후지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없지만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서 구글에 '食べ物(음식)'을 검색해 보았다.
(왠지 일본어로 검색을 하면 현지인 맛집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쓰야마는 귤과 더불어 도미덮밥이 유명한 것 같았다.
근처에서 제일 평점이 높은 가게에서 먹었는데 적당한 맛이었다.
먹는 방법이 그려져 있는 코팅된 종이가 있었다.
먼저 도미회를 즐기고, 계란 노른자를 밥에 넣고, 소스를 뿌리고 도미회를 밥 위에 올려 같이 덮밥으로 먹는 것 같았다.
새로움이 식욕을 돋우게 했지만, 사실 회가 일본이나 한국이나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거의 안 해본 웨이팅을 해본 것을 보면 꽤 맛집인 것 같긴 했다.
이 식당에서는 특이하게도 여행하면서 거의 부딪친 적도 없는 한국분들이 내 옆자리에서 대화를 하며 드시고 계셨다.
역시 한국인은 생각이 거의 비슷한가 보다.
마쓰야마에는 '시모나다'라는 유명한 역이 있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에서만 보는 감성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인기가 있다. 게다가 바다로 들어가는 끊겨버린 철도 또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난 '바이신지'역으로 가기로 했다. 바이신지 역도 꽤 괜찮은 감성이 있는 역이라 시모나다역의 대체 관광지가 된다. 게다가 귤박물관도 있다.
시모나다역은 배차간격도 길고, 꽤 거리도 있어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다.
일본여행에서 느끼는 건 대체적으로 하늘이 맑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미세먼지가 한국보다는 덜해서 그런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역 근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피부가 굉장히 까맸다.
바이신지역에 내려온 김에 귤박물관을 보고 가려했지만 정문 앞의 안내문을 읽어 보니 이미 영업시간이 지나버렸다.
흠.... 뭐, 어떻게 되든 좋다. 흠집이 느껴지는 나무 테이블이 있는 빈티지한 카페에서 블랙커피 한잔 마신다면 그것도 나름의 관광지가 될 것 같았다.
커피를 먹고 싶어 역 주변을 한참 걸었지만 카페하나 없었다.
확실히 이곳은 공항이 있는 도시치고는 굉장히 시골이다.
그래도 뭐, 상관없다. 덕분에 운동은 했으니까.
어느덧 해는 지고 마지막 밤에 뭐라도 하고 싶어 관람차를 타보기로 했다. 방금 쇼핑했던 백화점 위층에 관람차가 있었다. 관람차를 기다리며 '가챠(뽑기)'를 했다. 난 울트라맨을 뽑고 싶었는데 울트라맨 받침대만 나왔다.
의미 없는 상품이라 아직도 포장을 뜯지 않고 집에 있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사 갈 때쯤 행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쓰야마의 야경은 뭐랄까?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예쁘긴 했다. 그뿐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야 자유롭고 좋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소도시는 내 성향에 안 맞는 건가?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일단 호텔에 돌아가 보기로 했다.
"하이볼이라도 마시면 즐거워 질려나?"
그렇게 2일째의 뜨거운 여름의 밤은 눅진하게 술로 적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