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카 Nov 10. 2023

농교육에 대하여 (1)

청각장애인 학생들에 대한 교육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

모두가 같은 교실에서 동일한 언어로 선생님께 수업을 받는다. 모두 듣고 말하고 뛰어다니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아이들이다. 어떤 아이는 제일 앞에 앉아서 선생님의 말씀 토씨 하나라도 놓칠 새라 귀를 쫑긋 세우고 수업을 듣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재잘거리며 선생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과 속닥대기 바쁘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이렇게 수업을 받아왔을 것이고 당신의 자녀 역시 그렇게 자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다.


얼마 전 농교육에 대하여 개편을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위의 상황처럼 그저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던 사람들은 굳이 시위까지 해가면서 무엇을 바꿔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과연 청각장애인 학생(이하 농학생)들은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기에 이렇게 개편을 요구하는 것일까?



당신이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났다면 학교에 가기 전에 두 가지 선택 안을 가질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신이 기존에 생각해 오던 학교의 모습과 같이 비장애인 친구들이 소리치고 말하고 재잘거리면서 다니는 학교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일반 학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청인 학교'라고 칭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청각장애인 학생들만 모여 있는 학교다. 누군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누군가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청각의 정도가 다양하다. 이런 학교를 사람들은 특수학교라고 칭하지만 우리는 '농학교'라고 말한다.


첫 번째 선택 안으로 결정했다면 (물론 당신이 아니라 부모님이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신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보청기를 착용하거나 인공와우라는 수술을 받아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학생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남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학생들 틈에 섞여있을 것이다. 그렇게 매일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으며 똑같은 수업이 이어지는 학교를 간다. 하지만 당신이 단 하나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수업시간 동안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당신이 즐겨 듣는 팝송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는 알지만 그것을 따라 불러보라고 하면 "나나~나나나~" 이렇게 대답하게 되는 것처럼.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친구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때 "뭐라고?" 라며 다시 되물으면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 틈에서 한 명의 선생님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 때 "뭐라고요?"라며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당신은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자리에 앉아있다. 무슨 말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남들 하는 것처럼 책상에 딱 붙어 앉아서 그들처럼 칠판 위에 쓰인 글을 따라 적어 내려 간다. 때때로 친구들이 현란한 색의 형광펜으로 밑줄 긋는 것들을 곁눈질로 보면서 따라 긋는다. 그렇게라도 해야 지루하기만 한 한 시간가량의 수업시간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칠판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지만 선생님은 계속 무언가 말을 하고 친구들은 공책에 글을 적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한껏 짝꿍의 책상 가까이 몸을 기울여 베껴 쓴다. 왜 적어야 하고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한들 일단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것이 선생님의 지적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러나 이 방법은 머리가 커갈수록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열심히 적은 필기를 베끼게 내버려 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학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칠판에 다양한 숫자와 도표를 그린다. 책을 봐도 칠판을 봐도 아주 어릴 적에 배웠던 간단한 더하기 빼기 외의 용어들은 이러나저러나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선생님이 원리를 열심히 설명해 준다고 한들 원리 자체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이해할 텐데 당신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다른 수업 때와 같이 칠판에 그려진 도표를 따라 그리고 숫자를 끄적인다. 모든 설명을 마치고 책에 나와있는 예시 풀이를 하라고 시간을 주는 선생님의 지시에 친구들은 일제히 문제를 풀기 바쁘다. 그러나 당신은 그저 뚫어져라 수학 책을 바라만 본다. 행여나 선생님이 칠판 앞으로 나와서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수학 시간이야말로 선생님과 절대 눈 마주치면 안 되는 시간이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 영어 시간이 되었다. 반장이 와서 반 학생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이번에 영어 수업은 이동 수업한대! 어디 어디 교실로 모이래!" 이동 수업은 들었지만 어디 교실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당신은 친구들을 따라 책을 들고 이동한다. 알고 보니 오늘은 원어민 선생님 수업이 있는 날이다. '와, 최악이다.'라고 속으로 되뇌며 시작된 영어 수업. 한국말도 못 알아듣겠는데 영어는 어떻겠는가 아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칠판에 쓰이는 글들이 한국어로 어떤 의미인지 찾기 바쁘다. 친구들은 선생님의 발음을 따라서 곧잘 문장을 읽는다. 하지만 당신은 단어 하나를 영어 사전 옆에 나와있는 발음 기호를 통해서 더듬더듬 익혀나간다. '아, 이렇게 발음을 하는 것이구나. 근데 이게 맞나?' 당신은 발음 기호를 보고 선생님 입모양 한 번 보고 따라 하면서 갸웃거린다. 그새 수업 종이 울린다.


어떤가?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농학생들이 청인 학교에 진학했을 때 겪는 일이다. 어쩌면 청력 잔존 정도가 높아서 잘 들리는 사람이라면 선생님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고 하나 청각장애인이 비장애인만큼 잘 들을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잘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 두 번째 선택 안으로 결정했다면 당신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까?

매거진의 이전글 수어통역사가 어디든 존재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