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카 Sep 25. 2023

수어통역사가 어디든 존재한다면?

요즘은 어느 식당이든 사람이 직접 주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는 곳이 더 많다. 이처럼 비대면으로 무언가를 진행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일상이 된 세상에 살고 있는 현재. 은행 업무 역시 모바일 뱅킹을 이용하여 비대면으로 처리하기도 수월해졌다.


심지어 대출도 쉽게 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이전에는 은행에 일일이 방문해야만 대출여부조회가 가능했다면 지금은 어플 하나만 설치하면 다양한 금융권 대출 조회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어플에서 조회한 결과에 따라 대출 가능한 금융권을 찾게 되면 그 자리에서 즉시 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개인정보를 기입하고 나면 대출 신청이 완료되는데 신청 후 몇 시간 이내에 걸려오는 해당 금융권 상담사와의 음성통화까지 마치면 대출이 승인된다. 이처럼 비대면 업무는 바쁜 현대인들의 시간을 절약해주고 보다 편리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농인들은 여전히 이런 편리함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청인들이 어플로 대출을 신청하고 음성 통화로 본인 인증을 하여 즉시 대출을 받는 동안 농인들은 똑같이 어플을 깔아서 대출을 신청하더라도 음성 통화가 어렵다는 이유로 더 이상 대출 진행이 어렵기 때문이다.


음성 통화가 어렵기 때문에 농인은 수어통역사를 찾아가서 대신 전화를 받아 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수어통역사가 대신 전화를 걸게 되면 상담원은 대출을 신청한 당사자인 농인이 곁에 있다면 농인에게 음성으로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런 응대를 요청받을 때마다 얼마나 농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회인지 확연히 느낀다. 누누이 말하지만 장애 정도에 따라서 누군가는 듣고 답할 수 있을지라도 누군가는 그럴 수 없다.)


어쨌든 음성확인을 통해서도 본인 확인이 어려운 경우에는 본인 확인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대출 승인이 거절되거나 금융사로 직접 찾아가서 고객등록확인을 해야 한다고 안내를 받게 된다. 각 금융사마다 다른 방식을 취하지만 어찌 되었든 청인들처럼 대면 업무 없이 진행하기 어려운 점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이 편리하기 위해서 비대면 업무가 나온 것이라면 농인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누군가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한다면 이 역시 차별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면 늘 생각한다. 병원이든 은행이든 동사무소든 기관별로 수어통역사가 의무적으로 배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당신이 은행이나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당신은 아무런 고민 없이 각 기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농인들은 그곳을 이용하기 전에 수어통역사를 먼저 찾아가야 한다. 그곳에서 수어통역을 의뢰하고 난 후에 자신에게 배치된 수어통역사와 함께 은행이나 병원을 가야 소통의 문제없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어의 한계로 인해 언제 어디를 가든 즉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이와 누군가와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이가 갈라진다. 농인들도 청인들처럼 언제든 기관을 방문했을 때 즉각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요자가 직접 공급자를 찾아서 함께 대동해야 하는 불편함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수어통역센터는 수요는 많으나 공급은 지극히 적은지라 농인은 빠른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없어서 불편하고(수어통역사가 없으면 농인들은 다른 수어통역사를 찾아야 한다) 수어통역사는 수어통역사대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상황이다. 만약 수어통역센터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기관별로 활동하는 수어통역사가 기본적으로 두 사람 정도 배치된다면 어떻게 될까?


1. 전문성 향상

당신이 만약 법적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서 법원에 찾아갔다고 가정해 보자. 알다시피 법적 용어는 너무나 방대하고도 생소한 용어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전문가로부터 상세하게 설명을 들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당신은 모르는 용어에 대해서 해당 전문가에게 바로 답변을 들을 수 있지만 농인은 수어통역사를 통해서 말을 전달받아야 한다. 만약 법적 용어가 너무 어려워서 수어통역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수어통역사 역시 전문가에게 되묻게 된다. 수어통역사가 이해할 때까지 설명에 설명을 거듭한 후 그제야 통역이 진행되는 것과 전문가들을 통해서 즉시 답변을 얻는 것과 어떤 것이 더 전문적으로 진행될까? 당연히 후자다.


이처럼 기관별로 업무체계가 다르고 사용하는 용어 및 전문 지식도 다르기 때문에 각 분야에 맞는 수어통역사가 배치가 된다면 해당 기관의 수어통역사들은 진행되는 업무체계와 관련 용어, 지식 모든 것에 이미 다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되묻는 번거로움 없이 바로 상세하고도 쉬운 설명이 가능해지는데 이를 통해서 해당 분야의 수어통역사의 전문성도 향상됨은 물론이고 농인들은 청인들처럼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시간 단축

예를 들어 당신이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서 예비 배우자와 함께 구청에 방문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나 구청에서는 모두가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고 당신과 예비 배우자만 한국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당신은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통역사를 데려가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려고 하는데 죄다 외국어로 적혀있어서 무슨 말인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통역사가 해당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줘야 비로소 이해하고 서류를 작성할 수 있다. 겨우 수어통역사의 도움으로 서류 작성까지 마쳤는데 그다음에는 직원과의 소통이 남아있다. 직원이 당신에게 무어라 안내사항을 전달하는데 당신은 역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통역사가 당신에게 직원의 말을 듣고 통역했을 때 당신은 이해한다. 반면 당신처럼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서 구청을 방문한 이들은 벌써 다 처리하고 자리를 떠나고 없다. 


예외적인 상황으로 보이겠지만 농인들에게는 일상인 상황이다. 만약 농인들이 가는 곳곳마다 이미 해당 기관의 수어통역사가 존재했더라면 농인이 수어통역사를 대동하지 않고 바로 기관으로 향할 수 있었을 것이고, <청인직원-수어통역사-농인> 순으로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관에 배치된 수어통역사가 이미 해당 진행사항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수어통역사-농인>으로 바로 통역이 이뤄지기 때문에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을 것이다.



돌고 돌아 다시 은행으로 돌아와서, 만약 은행 업무를 진행할 때 바로 영상통화가 진행되었더라면 농인은 직접 은행 창구로 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어떤 금융사에서는 전담 수어통역사가 배치되어서 근무하고 있지만 해당 사실에 대해서 상담원도 모르고 농인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보니 바로 영상 통화로 안내되지 않고 이렇게 창구 방문으로 안내되거나 업무진행이 거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통역 업무차 농인과 함께 은행에 갔을 때 그제야 해당 금융사에 수어통역 및 영상전화번호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 얼마나 홍보가 부족한가?)


수어통역서비스를 진행하는 기관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뿐만 아니라 홍보도 잘 이뤄져서 농인이 어떤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할 때 바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영상통화 번호로 연락을 취하는 방법으로 즉각적인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때때로 이런 상상도 한다. 농인이 은행 창구에 찾아갔을 때 본인이 농인이라고 안내하면 당황하는 직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 화면처럼 큰 화면 앞으로 농인을 안내하는 이가 있는 것이다. 농인이 그곳에 앉아서 화면을 연결하면 본사에서 근무하는 수어통역사의 화면이 뜨면서 어떤 업무를 보러 왔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럼 농인은 바로 자신의 업무 사항에 대해서 전하고 은행 업무에 필요한 서류 작성은 화면에 뜨는 전자 페이지에 전자서명으로 이뤄진다. 그럼 청인들이 옆에서 음성으로 은행 창구 업무를 보는 동안 농인들은 화면을 통해서 수어로 은행 업무를 보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현재 복지뱅크 홈페이지에서 은행, 카드사, 공공기관, 기타 기관 등 기관별 영상전화번호를 안내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농인들이 명절을 대하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