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이유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지나치고 만나면서 종종 무례한 사람들을 마주하곤 했다. 언제나 무례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불편하고도 불쾌한 감정이 들게 하지만, 유난히 불편한 감정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 때가 있다. 바로 무례함을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겪는 경우다.
너무 좁지도 넒지도 않은 골목길을 남편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걸어가는 날이었다. 맞은편에서는 초등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학생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차도 다니지 않고 사람도 별로 없는 조용한 거리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이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 아이들의 말소리가 꽤 거리가 있음에도 잘 들렸다.
그러다가 어느 한 아이가 외친 말, "어? 청각장애인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뭐랄까,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 우리를 향해 걸어가면서 "어? 원숭이다!"라고 외치는 말을 들은 느낌이랄까?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우리는 청각장애인이 맞으니까 맞는 말하는구나 하고 그러려니 하며 지나치려 했다.
문제는 서서히 지나가면서 그 아이들이 내 곁을 스치려는 찰나에 발생했다. 상대방이 어떤 향수를 뿌렸고 어떤 향이 나는 샴푸를 사용했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갑자기 그 아이가 "악!"소리를 내질렀던 것이다.
들으라는 듯이 나의 귀를 향해서 얼굴을 돌리며 큰 비명을 지르던 아이.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굉장히 놀랐고 순간적으로 짜증과 화가 함께 올라와서 나도 모르게 "돌았나!"라고 외치며 뒤돌아봤다. 소리를 지른 아이는 뒤돌아 보지 않았고, 곁에 있던 두 친구들이 난처하게 나를 뒤돌아보며 소리 지른 아이의 손을 이끌며 유유히 멀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아이들을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아해하면서 물어보는 남편의 손짓에 그제야 아무 일 없는 듯 뒤돌아 섰지만, 불러 세워서 뭐라 하지 못한 채 넘어간 내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일까 했더니 아는 농인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어느 더운 여름날 친구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주었다.
좁디좁은 지하철 좌석에 앉아서 친구와 함께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별안간 그녀의 팔을 누군가가 퍽 치는 느낌을 받았다. 옆을 돌아보니 고등학생인가 대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학생이 휴대전화를 만지며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좌석이 좁아서 모르고 친 것이려니 하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는데, 다시 또 팔꿈치로 그녀의 팔을 치더란다. 한 번이야 실수라고 넘기겠지만 두 번이나 치다니 고의로 팔을 친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아무래도 움직이는 팔 때문에 불편했구나 생각하고 대화하기 힘들지만 조금 작게 수어를 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아주 세게 그녀의 팔을 치던 학생. 결국 화가 난 그녀는 왜 자꾸 팔을 치냐며 말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굉장히 짜증을 내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들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누군가가 하는 말이 욕설이라면 입모양만 보더라도 우리는 욕설이란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한참 어린아이가 내뱉은 욕설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그녀는 결국 학생과 언쟁이 일어났다.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역무원이 왔고, 지하철에서 하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청인 지인과 상대방 학생의 부모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간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는 그녀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농인들은 알다시피 수어로 소통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하기 위해서 손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수어로 대화하고 있는 사람을 팔꿈치로 치는 것, 휴대전화를 만지면서 다른 청인이 앉아있는 왼쪽은 팔을 과하게 펼치고 있지 않으면서 본인이 앉아있는 오른쪽만 넓게 펼치는 것,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음에도 상대방을 치는 것 등.. 이 모든 행동들은 대체 어디서 배운 예의인가? 청인에게는 가만히 있고 농인에게는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교만함과 차별의 행동이지 않고서는 무엇이냐?"
지인을 톻해서 그녀의 말이 전달되었고, 학생 부모 측의 사과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내내 말하고자 하는 권리를 박탈하려는 학생의 행동에 굉장히 분노가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알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모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의아함을 던지는 아이들의 무례함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각기 다른 상황이지만 모두 장애인들 향해서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점은 동일한 두 아이들이, 왜 이 사람은 손을 이용해서 대화를 해야만 하는지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왜 타인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는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것인지 알고 있었더라면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일어났을까?
<스웨덴 육아>라는 책을 읽어보면,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양말 바꿔 신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한다. 양말 바꿔 신기란, 짝짝이 양말을 신고 가서 그 양말을 모두 벗어놓은 후 서로 마음에 드는 양말을 골라 신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서로의 개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며 다양성에 대해서 가르쳐준다고 한다.
두 돌,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이지만 스웨덴에서는 두 돌이 된 아이들을 '아직 두 돌'이 아니라 '벌써 두 돌'로 바라본다. 말로 잘 설명하면 어린아이라도 차별이 무엇인지 단어의 뜻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다양성에 대해서 교육하는 스웨덴의 교육방식을 읽어 내려가면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위의 사건들이 이곳에서는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도 이제는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다민족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런 친구들을 곁에 둔 아이들은 피부색이 달라도 함께 놀며 친하게 지내지만, 종종 어느 부모는 그런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며 선을 긋는다고 한다.
이 동그란 지구에는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고 노란 피부,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과 서로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아는 어른들이 너무 많다.
흔히 자라나는 아이들을 미래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미래가 더욱 평등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식적인 교육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육을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릴 적부터 다양성을 배우면서 나와 다르게 생기거나 다른 방향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나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이해하는 스웨덴의 아이들처럼, 이제는 우리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다른 것에 대한 다양성에 대해서 알려주어야 하는 때가 오지 않았을까?